성경에 보면 많은 기적들이 나온다. 노아의 홍수, 애굽에서의 열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짐, 사막에서의 만나, ... 신약시대로 가서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예수의 부활까지. 이런 많은 기적들. 인간의 이성으로는 믿기가 굉장히 힘들다.

첫째, 이런 기적들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된다. 노아의 홍수가 생기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가장 높은 산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의 물이 있어야하는데, 그 엄청난 양의 물이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노아의 방주만 해도, 하나의 방주 안에 어떻게 모든 동물들을 쌍쌍이 넣을 수 있었을까? 그 먹이는? 그 배설물들은?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가? 아무도 죽은지 사흘이 지나가서 부활하지 않는다. 잠깐 숨이 끊어졌다 살아나는 이는 있어도, 예수처럼 무덤에 뭍혔다가 살아나는 사람은 없다.

둘째, 이런 기적들이 왜 성경의 시대에만 나타나는가? 지금 세상에는 왜 부활하는 사람이 없는가? 왜 지금 세상에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지는 않는가?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 한번이라도 보여주면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것 같은데 말이다. 간혹 가다 기도해서 병이 낳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우연이거나 아니면 정신적인 위안에 불과하다. 부흥회에서 은혜받고 암이 낳았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일년 있다가 죽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셋째, 기독교에서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의문이다. 기도를 해서 기도한데로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고 하고, 그대로 안되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그렇다면 기도에 응답해서 인간세상에 개입하신다는 하나님은 어디에 있는가?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라면 기도하는 의미가 그럼 무엇인가?

템플턴은 그의 책에서 "이성이 조금만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전설이 동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한다. 이성과 기적, 과학과 기적. 같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생각하는 사람이 기적을 믿는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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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언급했듯이 찰스템플턴이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아이를 안고 고통하는 한 여인의 사진을 보았을 때였다. 실제 아직도 아프리카에서는 하루에 만이천명의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거나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간다고 한다.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아 온 얼굴에 붙어 있는 파리떼를 쫓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마음 아픈 모습인지.

그 뿐인가. 세상 곳곳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목숨을 잃거나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환경이 좋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술취한 운전사에 의해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어버린 가정. 유괴범에 의해 소중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신앙생활 열심히 하던 착한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윤상병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의 신앙이 부족해서 생긴 일일까?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세상의 고통과 사랑의 하나님을 연결시키기는 참 어렵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서 인간의 고통을 그대로 놔둔다면 선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한다 하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을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가끔 아이들이 힘들어도 가르치기 위해서 그냥 놔두는 부모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힘든 것과 죽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른 각도로 선하기에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기 원하더라도, 해줄 수 없다면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다. 마치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어 악한 신이 인간을 괴롭혀도, 선한 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는, 힘이 딸리는 그런 식의 신화가 되어버린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할 수 있는가?

세상의 적지 않은 재앙이 사람으로 인해 생긴 것들이다. 하지만 큰 재앙을 가지고 오는 지진이나 가뭄, 폭풍, 전염병등은 사람의 잘못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런 것들을 콘트롤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누군가? 그건 신이 아닌가?
 
첫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구나 한번은 느껴봤을 질문. 아픔을 겪었거나, 주위의 고통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도데체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질문 한 번은 다 해보지 않았을까?  

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에 고통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것 같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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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아이를 좋아하는 여인이 하나 있었다. 이 여인은 사랑이 워낙 넘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줄 아이들이 필요했다. 아이들과 같이 지내는 시간이 이 여인의 최대 행복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아이들이 나중에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착한 아이로 자랄지, 아니면 말을 안듣는 나쁜 아이로 자랄지 알 수가 있었다. 무섭지만 아이들이 만약에 말을 안들으면, 그 아이들은 평생 감옥에 같혀 매일 매일 형벌을 받아야한다. 그래도 이 여인은 아이를 낳는다.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동시에... 그리고 그 모든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중의 반 넘는 아이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나쁜 아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전지 (모든 것을 앎) 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사랑이라는 속성을 섞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면 위와 같은 모양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이 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의 시나리오다.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이 필요해서 그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 두어 살게 하였는데, 그 에덴 동산에는 선악과라는 나무를 두어 인간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하는 것을 항상 기억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으며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을 했고, 그 결과 인간 세계에 죄가 들어왔다. 아들인 예수를 보내어 착한 아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많은 아이들이 나쁜 아이로 자라 결국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전지하신 하나님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을 몰랐을까? 몰랐다면 전지한 하나님이 아니다. 만약 알았다면 그건 방임이 아닌가? 어떤 부모가 사랑하는 아이를 놀이방에서 놀게 했다. 그 안에는 아이가 재미있게 놀만한 장난감이 참 많이 널려있다. 그런데 그 안에 칼한자루가 놓여있다면? 아이한테 이 칼은 위험하니까 절대로 만지지마? 라고 했다고 부모의 책임이 다 없어지는 걸까? 더군다나 그 아이가 칼을 만져서 다칠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렇다면 미리 그 칼을 없애버리는게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부모의 책임이 아닐까? 아이가 칼을 만져서 다쳤다면 도데체 누구의 책임이 더 큰 걸까? 게다가 그 부모는 아이가 칼을 만졌다고 놀이방에서 쫓아내버렸다.

심각한 자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전지 (모든 것을 앎) 전능 (모든 것을 할 수 있음), 무소부재 (어디에나 있음), 영원성 (처음과 끝이 없음), 그리고 변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데체 이런 하나님이라면 인간이 태어나서 고생하고, 그리고 많은 수의 인간들이 결국 지옥에서 끝나지 않을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인간을 왜 만들었을까? 자기 만족을 위해서? 사랑의 대상이 필요해서 강아지 하나 데려오듯 인간을 만들은 걸까? 그렇게 해놓고 왜 자기 자식까지 죽여가면서 인간을 위해 애를 쓸까? 아예 처음부터 인간을 만들지 않았으면 되는 것 아닐까? 그럼 사랑할 대상이 없어서 너무 외로워지는 건가? 그걸 못참는다면 전능의 하나님일까?

우리 딸이 예뻐하는 강아지 인형이 있다. 너무나 예뻐해서 잘 때도 안고 자고, 학교에도 들고 다닌다. 그 강아지 인형은 절대로 내 딸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우리 딸이 그 인형으로 인해 얻는 즐거움이 줄어드는 것 같지도 않다. 사랑하고자하는 딸 아이의 욕구를 강아지 인형은 적어도 지금은 충분히 만족시키고 있다.

사랑할 대상이 필요하다면 아예 인간의 인형을 만들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말 잘듣는 천사들도 있지 않은가? (몇몇은 반항을 하긴 했지만...) 도데체 인간을, 그것도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을 하나님은 왜 만들었는가?

인간들이 죄(성경이 말하는)를 짓고 고생하다 지옥에 가는 것... 그건 인간과 하나님의 공동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상황을 충분히 아시는 하나님이 왜 그냥 놔두셨을까?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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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가족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우선 9살 먹은 우리 딸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아빠.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왜 사탄을 그냥 놔두시나요? 지금 사탄을 없애버리고 사람들이 다 차가게 살면 안되나요?" 나는 내가 알고있는 모범답안을 말해줬다. "그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실려고 그런 거야. 우리는 로봇이 아니잖아". 그 대답에 우리 아이는 만족한 모양이다. 그래 우리는 로봇이 아니지...

아내에게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에 같이 쓸 수 있는 저널을 하나 선물을 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은 릭워렌이라는 목사가 쓴 책으로 크리스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해 40일간 점검할 수 있게 쓰여진 책이다. 많은 기독교인이 읽고 영향을 받았다. 이 책 첫날 내용이 이거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아내가 그걸 읽고 나서 나에게 한 말. "이게 우리 살아가는 목적의 전부라면 우리는 로봇 아닌가?" "전에는 다 이해가 되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동의가 안되네"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인가?"

자유의지를 주었다고 하면서, 우리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자유의지는 원래 지어진 목적대로 살지 않는 자유의지가 아닌가? 결국 죄를 짓는 자유의지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것을 즐겨하시는 것 같다. 고민하고 갈등하지 않는 방법은 딱 하나다. "믿고 그냥 고분 고분 순종하는 것" 그럼 그게 로봇이랑 뭐가 다른가? 결국 하나님이 원하는 건 로봇이란 건가?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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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간 간직하고 있던 신념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며...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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