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할려면 먼저 기적의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 같다. 국어사전에 기적의 뜻은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일'으로 정의 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 또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기적이라고도 표현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은 소위 기적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은 온갖 기적으로 가득차 있다. 노아의 홍수, 애굽의 열가지 재앙, 갈멜산에서의 불내림,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예수의 부활까지. 그뿐인가. 요즘도 교회 내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암이 낳았다는등의 육체적인 현상도 있고, 기도를 했더니 고아들을 먹일 빵이 배달이 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기적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이 기적이라는 것이 이성적으로 참 납득하기 어렵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은 다 전설이나 동화 같고, 요즘 벌어진다는 기적들은 사기극이거나, 심리적인 착각, 혹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게 더 이해하기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쉽기 때문이다. 양보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건 아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 그게 기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보여주면 모두가 기적이라 벌벌 떨겠지만,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지금 벌어지는 현상들도 언제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무신론적인 주장이다. 결국 기적이란 없다는 것이다.

근데 이걸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적이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오랜 기간 동안,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중에 우연이라고 굳이 설명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을 빼고도 설명을 할 수 없는 물리적인 일이 두가지가 있다. 내 옆에서 벌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일들은 제외했다.

이십여년전 큰조카 (큰 누나의 아들)과 둘째 조카 (둘째 누나의 딸)이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아이다 엄마 배속에서 같은 문제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건 고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였다. 한쪽에 응어리가 져서 그걸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년 가까운 물리치료를 해야했었다. 아니면 평생 그 흔적을 가지고 있게 된다고 한다. 당시 전도사였던 큰 매형 식구는 일년 가까운 물리치료를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였다. 그래서 기도를 했고 하루만에 큰 조카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응어리가 없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리치료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둘째누나의 딸은 치료를 못받았기에 그 흔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흔히들 기도를 받고 병이 고쳐지는 것은 기도 받은 사람의 자기 암시를 통한 착각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정신력이 치료를 도왔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큰 조카의 경우는 그때 오개월이 안되었다. 자기 암시를 할 수도 없거니와 정신력이 발휘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질병도 절대적으로 장기적인 물리치료를 해야지만 되는 경우였다. 오히려 암이 낳는 것보다도 더 타당한 설명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또 하나는 소위 말하는 성령체험이다. 방언 같은 것이다. 방언을 하거나 진동을 경험하는 것을 보고 집단적인 히스테리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뭐...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 하지만 방언도 익숙해지면 집단 히스테리 속에 있어야만 방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면 어디서든지, 전철 안에서도, 회사에서 근무하다가도, 즉 아주 멀쩡한 상태에서도 방언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대화도 나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방언에 대해서는 정신적인 착각이라 말할 수 있어도 내가 그걸 경험하고 있을 때는 정말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방언은 내가 아주 정상적인 상태, 전혀 흥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내게서 내 입에 대한 콘트롤을 뺐어간다. 그 현상은 지속적이며 일관적이다. 그리고 하면 할수록 더 발전되고 (어휘가 늘어나고) 내가 콘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늘어난다.  이런 현상을 이성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직접 보고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기적은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눈 앞에 벌어지는 현상이 있고, 그 현상을 '아직까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두가지의 타당한 설명이 있을 수 있다. 한가지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적은 없지만 아직은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을 통해 분명히 원인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입장이고, 또 한가지는 기적의 원인이 되는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온 세상을 창조한 -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들을 인정하기란 어렵지가 않게 된다. 천지 창조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었다면, 예를 들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창조자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선택의 문제로 돌아가는듯 하지만, 그래도 차근 차근 창조자의 존재 여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하겠다. 유신론 특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창조자의 존재 증거는 다음의 다섯가지로 요약이 될 수 있다. 사실 증거라기보다 상황에 따른 추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1. 신을 통해 세상의 근원을 설명할 수 있다

우주의 근원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빅뱅이론이다. 빅뱅이론은 우주 전체가 아주 오래전 생긴 대폭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이론이다. 공간과 시간은 대폭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대폭발 이후에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이론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들이 있기에 이 이론은 현재 우주의 근원에 대해 가장 타당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이론에 대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빅뱅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의견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우주 자체가 근원이고 영원하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자'이며 영원하다고 믿는다. 우주 자체가 근원이거나 아니면 그 우주를 만들어낸 근원이 되는 신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주에는 출발점(빅뱅)이 있기에 빅뱅을 일으킨 원인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유신론자들의 주장이고, 그 원인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2. 잘 꾸며진 우주와 인간은 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면 참 잘 짜여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정교한 것을 보면 누군가 디자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결과다라는 것이 더 믿겨지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사실 지금의 세상이 우연의 결과다라는 주장은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였다. 그 때문에 최근 몇십년간 현재 결과의 개연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시 되었다. 하지만 어느 이론도 반대되는 증거가 있는 상태다. 혹은 스티븐 호킹처럼 무한 우주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무한대 수의 우주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우연히도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어쩌면 '신이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도 더 증명하기 힘들어 보인다. ^^

#3. 객관적 도덕 기준의 존재 여부는 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주장은 두가지의 작은 논쟁거리를 담고 있다. 첫째는 객관적 도덕 기준이라는 것이 있느냐 하는 것과, 객관적 도덕기준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객관적 도덕 기준이라는 것은 없다라고 말을 한다. 세상의 많은 도덕 기준들이 사회적인 발전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람들 사이의 동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구하고 어떤 것들은 명백히 '나쁜 것이다'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다. 나는 이 문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는데, 그 마음을 잠잠히 들여다 보며 '살인이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애들을 학대하는게 뭐가 나쁘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찌에 대한 유태인 학살이 단지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이지 '객관적으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세상에 객관적인 도덕 기준이 있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객관적 도덕 기준이 있다는 것이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이 그런 객관적 도덕기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사람들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이, 객관적 도덕기준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데로' 행동한다면... 그게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문 사회면에 보이는 도저히 이성이 있다면 할 수 없는 추악한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대로 발전한다면 이게 지옥이 아닐까?

#4. 신의 존재는 부활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설명이다

부활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또 다른 논쟁거리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당시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설명하기가 굉장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 있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는 따로 한번 정리를 해 볼 생각이다. 그렇다면 부활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부활은 없다. 몸속의 장기들이 활동을 하지 않아 잠깐 가사 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예수처럼 외부의 요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후에 36시간이 넘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누가 살려주지 않는 이상, 누군가 살려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가 있지 않은 이상 부활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5. 신은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아마도 이 주장은 가장 주관적이면서도, 어쩌면 가장 객관적인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나에게 너의 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여러가지 증거를 댈 수 있다. 운전면허증, 주민등록등본, 같이 찍은 사진 등등. 하지만 나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런 증명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왜냐면 나는 나의 부인을 보고, 만지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 신을 경험하는가? 최근 한달여 동안 지난 20여년을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 삶 속에서 신, 즉 하나님을 경험했던 순간들이 꽤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구나. 내가 하나님을 통해 변화되고 있구나. 그런 경험들이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물리적인 경험도 있지만, 사실 나에게 더 놀라운 것은 내 생각과 태도의 변화다. 누군가 물어볼 수 있다. 그게 나의 착각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냐? 그게 객관적이라고 증명할 수 있냐? 노력이야 하겠지만 내 경험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은 안 한다. 그 경험들은 철저히 주관적이니까. 대신 앞에서 제시한 몇가지의 주장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일정 정도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객관적으로 신이 없다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과 주관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신 이외에는 타당한 설명이 없다'라고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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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세상에 왜 고통이 있을까?"

첫번째 질문이면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도록 만드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일단 "믿음사건: The Case for Faith"의 해당 내용을 읽었다. 질문에 대해 충분히 동감하면서,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히 되새기면서 읽었다.

그 대답은 어떻게 보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하나님은 선하다, 고로 악을 미워한다. 하나님은 전능하다, 고로 악을 없앨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하다, 고로 어느것이 좋은 것인지 안다. 이 세가지를 생각한다면 논리적 결론은 "이 세상에 악이 있을 수는 없다"이다. 하지만 악은 있다!! 세상에 고통은 있다!!

아직 나는 "무조건 믿고 맡겨라"는 용납 못하겠다. 우리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므로 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도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일관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일관적인 설명이 있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통의 문제, 악의 문제를 말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자유의지이다. 인간을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차라리 나을 로봇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고민 안하게. 그냥 딱 정해진 방향으로만 살아가게.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에게 좋을 것이 될 수 있기에 고통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해못할 말은 아니다. 맨날 나를 보면 생긋 웃고 있는 강아지 인형보다는, 가끔은 짖기도 하는 진짜 강아지의 사랑이 더 가치있을 것이다. 밥만 주면 좋아라 하며 꼬리치는 강아지보다는, 맛나게 차려줘도 불평하는 딸아이의 사랑이 더 고귀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놔두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하기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사실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늘의 나쁜 것이 내일의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건 이성의 문제는 아니다. 이건 체험의 문제이다. 이런 전제하에 예수의 사건은 최대한의 고통이 결국에는 좋은 것을 이룬 증거이다. 고통당하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 당시는 완전한 패배였지만, 그 패배가 있었기에 결국 그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고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고통 당하는 이들은 더 신을 찾게 되고, 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아무일 없이 편안할 때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더 신앙이 좋아진 것 같다. 우리 집만 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한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그거야 힘드니까 의지하는 것을 찾을려고 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이 있다면 인간의 고통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의 예는 참 많이 보인다. 고통의 상황에서 인간은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신을 부정하고, 어떤 이는 신을 발견한다. 자유의지가 있기에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통의 상황에서 인간은 신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많은 고통을 받았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를 왕으로 삼겠다고 떠받들던 백성들은 그를 못박으라 외쳤다. 매맏고, 찢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히며, 하나님과의 단절까지 경험했다. 유태인 수용소에 같혔던 코리텐붐의 말대로 "우리 상황이 아무리 어둡다 한들, 그는 더 어두운 곳에 있다". 그가 고통을 당했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고통 가운데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예수이다.

믿겨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일관적인 납득할만한 설명은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전체에 대한 명백한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신이 자기 멋대로 인간을 괴롭히는 엉터리 독재자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5년전 한 부부가 있었다. 교회는 다녔지만, 그렇게 열심은 아니였던 남편은 부동산을 일찌기 시작해 열채도 넘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부인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골 외진 곳에 갔다가 맹장이 터졌다. 그런데 시골 의사가 오진을 해서 약을 잘못주어 결국 맹장이 썩게 되었는데도 이를 며칠간 내버려 두었다.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내장은 망가질데로 망가진 상태였고, 수송 도중 실제로 숨이 잠깐 멈추었다 다시 회복되기까지 했다.

육개월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그동안 벌어놓았던 재산을 다 날렸음에도 남편은 부인이 살아났음에 감사하며 정말로 열심인 신앙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2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니며, 정말 성실하게 직장생활과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농원을 선교사업에 쓰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드렸다. 자신은 너무나도 검소한 생활을 하시면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이야기다. 고통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고통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고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는 사실 내 바로 옆에 있다. 장인 장모의 인자함과 열심, 성숙함에는 언제나 고개가 숙여진다. 그 분들 보면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자다.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 그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은 오히려 신에 가까와진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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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프가 새벽기도를 참석한지 이틀만에...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경제적 문제에 해결책이 생겼다.
그동안 고민해오던 큰 녀석과의 관계가 많이 개선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30년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수한 기도의 응답을 받아왔다.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정신적으로, 때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냥 우연이거나, 그냥 심리적인 해결책만이 아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질병의 치료까지...

성경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다.
구약의 하나님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수준낮은 부족신일 수도 있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주장... 유치한 흑백논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기도 하면 들어주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시는 분이라면...

기도할수록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면...
그 받은 사랑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면...

그냥 공허하던 인생에 목표가 생긴다면...
이제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하게 된다면...

그냥 맡겨도 되지 않을까?

내가 내 인생을 운전하는 것보다 맡기고 사는게 더 행복한데 그거면 된 것 아닐까?
Posted by 쉐아르
:

얼마전에 읽은 책에 대해 교회 사람들에게 소개할 목적으로 쓴 글이다. 이 책을 읽고 내 신앙을 점검하며 그전에 질문하지 않았던 기독교의 이해 되지 않고 모순된 점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점검하기 시작하게 되었으니 참 아이러니 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정말 기독교를 알고 기독교를 비판할려면 이 정도의 지식을 조사해보고 반박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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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시대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는 이천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이천년전 실제로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을까? 그 시간동안 후세 교회들이 자신들을 위해 성경을 바꾸었다는 의심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지금의 기독교는 전설과 다른 종교들의 혼합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정말 우리가 믿는 것이 예수가 이야기한것과 같은 것인가? 누구는 예수가 한번도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부활이 정말 있었을까? 예수는 실제 죽은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무덤에 옮긴 것은 아닐까? 유대 사람들의 주장대로 예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친 것은 아닐끼? 우리가 부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자신에게 해보거나 아니면 들어봤을 만한 질문들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전통적인 가치관은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세상에서는 더 많은 질문을 하게 된다. 기독교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 많은 경우 논리보다는 믿음으로 대응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게 접근한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 논리와 이성을 사용해서 답을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기독교는 "불타는 감성위의 이성 (Logic on the fire)"이라고. 기독교가 논리적이 아니라는 세상의 관점에 대해 이 책은 오히려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 책을 쓴 리 스트로벨은 예일법대 출신으로 시카고 트리뷴의 법조 담당 편집장을 지냈던 사람이다. 무신론자였던 리는 부인인 레슬리가 기독교인이 되면서 그녀의 변화된 모습을 보았다. 처음에 걱정을 했지만 그녀의 신실한 모습에 기독교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하게되었다. 스스로 이년 가까이 자신이 훈련받았던 법적인 지식과 분석 방법을 사용해서 예수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예수를 믿을 수 밖에 없다는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이 책은 본인의 영적인 여정을 참고 삼아 열네개의 질문에 대해 그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가 그들과 지적인 토론을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열네개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 예수의 생애를 담은 복음은 믿을만한가?
- 복음이 지금까지 변형없이 보존되었다고 믿을만 한가?
- 복음서 이외에 예수의 생애를 담은 참조자료가 있는가?
- 고고학은 복음서의 내용에 일치하는가 혹은 그 내용을 부정하는가?
- 예수님의 기록은 그의 신앙과 일치하는가?
- 예수는 진정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는가?
- 예수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말했을때 그의 정신상태는 신뢰할만 했는가?
- 예수는 하나님의 속성을 만족하는가?
- 예수는, 그리고 예수만이 메시야의 조건을 만족하는가?
-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죽었는가?
- 예수는 진정 그의 무덤에서 사라졌는가?
- 예수는 그의 죽음이후 사람들에게 보여졌는가?
- 그 밖에 부활을 증명할만한 다른 증거들이 있는가?

각 질문별로 그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서 인터뷰하는 내용을 담았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해서 결과만 담은 것이 아니라 마치 잡지의 인터뷰 기사처럼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히 전달하는 방법으로 기술이 되어 있어 매우 흥미로왔다.

각 질문별로 자세하게 증거자료를 제시하기에 평소 가졌던 질문, 혹은 불신자들이 해올 질문들에 대해 보다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 내용을 다 담을 수는 없고 개인적으로 강하게 다가왔던 내용들을 몇가지 이야기해보겠다.

- 성경의 내용을 담은 사본들과 고고학적 자료들은 다른 어떤 고대문서보다 월등히 많고 초기자료는 예수의 공생애 이후 2~30년내에 작성되어진 것으로 믿어진다. 따라서 기독교 외부에서 주장하듯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전혀 없다.
- 예수는 분명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이야기하였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그 말을 할 때의 그는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현명하며 안정되었다. 즉 예수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계셨다.
-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의학적인 지식과 역사적인 지식을 동원해서 예수가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고 돌아가셨는가가 자세히 저술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서 예수는 왜 그렇게 고통을 감수하였나 생각했다.
- 유태인이였던 라피데스 목사는 자신이 영적 방황끝에 예수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봐왔던 구약에서 말하는 메시야임을 알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그 자세한 과정을 통해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다.
- 예수의 제자들은 부활이 사실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분명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랬던 그들이 모두 자신의 목숨을 바쳐 부활한 예수를 전하였다. 세상의 누가 거짓을 위해 그렇게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이 사실이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가 아닐까 생각한다.

신앙이란 100% 이성으로 설명되어질 수는 없는 것이고 이해가 되어지지 않는 부분은 빌리그래함 목사가 그랬듯이 결국 믿음으로 굴복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성을 주신 이상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증명되는 부분들을 알게 된다면 더 믿음이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인 리 스트로벨은 인터뷰한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이 그들의 신앙을 더 강하게 만들었는가? 모두가 다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 참고로 이책의 10대용판도 있다.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서 미리 읽게 해주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될 거라 생각한다..

Posted by 쉐아르
:

부활에 대한 증거

2007. 2. 15. 03:28
많은 기독교 서적들이 부활의 증거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러가지 증거들이 제시가 된다. 비어있는 무덤, 사람들에게 보여짐, 사람들의 변화 등등. 일부에서는 부활은 후세에 타종교에서 빌려온 개념이 전설과 결합이 되면서 나중에 기독교에 소개된 것이라고 하지만, 굉장히 초창기에 쓰여진 바울의 신앙고백이 부활을 명시하는 것을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사실 부활은 부활을 믿는 것보다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다른 이유를 대는 것이 심정적으로 더 쉽다. 예를 들어 마리아가 찾아갔던 무덤은 예수의 무덤이 아니라 다른 무덤이였다던지, 아니면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기절해있었다던지... 그런 설명을 하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보다 더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는 논리적으로 결점이 너무 많다.

논리적인 기독교 서적들 (Case for Christ, 누가 돌을 옮겼느가)을 보면 부활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억지 주장을 가져다 붙여야되고, 부활을 믿지 않기 위해서는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는 말을 한다. 나는 그 주장에 어느정도 논리적으로 동의한다.

그 주장중 내 맘에 가장 강력하게 다가온 것은 제자들의 변화였다. 그 제자들은 분명히 부활이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예수가 죽지 않고 기절했었다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너무 결점이 많기에 죽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예수를 봤는지 안봤는지에 따라 부활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너무나 쉽게 증명이 되고, 제자들은 분명히 눈으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 제자들이, 겁쟁이였던 제자들이 갑자기 변했다.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면 그들 모두가 거짓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무엇을 위해서? 요즘의 정명석 같은 사이비도 그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진실을 알면서도 정명석 옆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는 돈이나 권력이 개입이 되어 있다. 예수의 제자들의 경우는 그런게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뭘까? 신념? 명예? 만약 부활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럴 수 있었을까?

내가 아직 신앙을 버리지 않은 것은 제자들의 변화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 말고는 그들의 변화를 설명할 수가 없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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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간 간직하고 있던 신념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며...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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