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못 내릴 것 같다.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생각하고 읽어보고, 또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지만, 양쪽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 생각할 때,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듯이,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 누군가 design한 자가 있지 않다고 하면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하지만 반대로 '전통적인' 창조론은 화석을 통해서 보여지는 대진화에 대한 증거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분명히 대진화라 여겨지는 중간화석은 존재하고 있고, 또 그 수많은 중간화석들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내 잠정적인 결론은 모른다이다. 어느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만으로 전체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것이 신이 있는지에 대해 모른다는 결정은 아니다. 진화론이 옳은가 틀린가의 문제는 더 생각하고, 더 공부하고 판단을 내릴 일이다. 아니 어쩌면 평생 마땅한 대답을 못찾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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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올이 인기다. 어느 신문이든 도올의 주장과 함께, 그게 새로운 지식인의 주장인양 한마디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기독교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참 웃기다 못해 한심하고, 또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오늘 읽은 기사의 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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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은 4일 펴낸 <기독교성서의 이해>에서 이미 논쟁을 불러온 ‘구약 폐기론’뿐 아니라 현 기독교에서 너무나 당연스럽게 여기는 유일신앙과 삼위일체설을 정면으로 반박해 또다른 쟁점을 만들었다.

그의 글은 예수 생애 전후 시대와 성서가 형성된 당시의 종교, 문화, 인물들에 대한 고증을 깔고 있다. 기독교를 공인해 13번째 사도로까지 불리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장인과 부인, 친자식까지 처참하게 고문해 죽인 ‘역사적 사실’도 글에 언급했다.

이 책은 ‘성서 문자 무오류설’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도올은 “초기 기독교엔 구전과 예배제식만 있었지 경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1세기에만 해도 예수한테서 직접 말씀을 듣거나, 직접 들은 제자한테서 직접 전해들은 ‘사도’의 말이 경전과 같은 권위를 지녔는데, 2세기 초에 이런 사람들이 모두 죽고, 교회 내의 구술 전통이 변형되고 왜곡되면서 곳곳에서 사도성을 가장해 경전을 저작하거나 편집하는 것이 자유롭게 이뤄졌다”고 쓰고 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앙은 야훼교를 창시한 모세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초기 기독교에선 예수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도 자연스러웠다고 주장했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와 ‘예수는 인간일 뿐’이라며 논쟁했던 아리우스는 오늘날엔 흉악한 이단자로 취급되고 있다”며 “그러나 당시 아리우스의 주장은 초기 기독교도들의 리버럴한 사상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대변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중재에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올은 “‘성부·성자·성신’이라는 말도 복음서의 개념이 아니며 오직 가톨릭교회 내에서 성립한 삼위일체 논쟁 이후의 독단적인 교리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활발한 서구에서는 자유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전통 탓에 논의 제약이 심했다. 도올의 주장이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배경이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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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도올이 삼위일체를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진리라고 인정한 이유를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그리고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자들을 이단자로 취급한 이유를 알고 있을까?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나오게 된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들을 제대로 찾아보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최초의 성경 사본의 추정연대가 50~60년이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세상에 가장 많은 사본과 참고자료가 있는 것이 성경이고 그들의 일치되는 비율이 95%가 넘는다는 것을 알고서도 자유로운 저작과 편집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성서 문자 무오류설’의 위험성을 지적했다고? 도올은 지금 기독교에서 성서의 문자 하나 하나를 아무런 의식없이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완전 무오류설을 믿는 교회는 없다. 필사 과정에서 실수가 생길 수 있는 것을 다 인정하고 있다.

도올이 하는 주장의 수준을 보면 그가 '다빈치 코드' 하나 읽고 말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올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없이 거론되어지고 수없이 교정을 거친 말들이다. 그런데 마치 자기가 새로이 깨달은 것인양 이야기하고, 또 그것이 새로운 지적인양 보도하는 신문들... 하나같이 한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적인 전통 탓에 논의 제약이 심했다고? 도올의 주장이 파격적이라고? 20년도 전에 아직도 고등학생이였던 나도 여러번 토론하고 고민했던 주제다. 도데체 뭐가 새롭고 뭐가 파격적이라는 건가?

한국 기독교가 교회 짓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초등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 말고 도올에게서 제대로 된 학문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지적을 보고 싶다. 어디서 줏어들은 소문을 말하는게 아니라 기독교 교리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 하는 제대로 된 비평을 듣고 싶다.

자기도취에 빠져 몇마디 한 것에 남비 들끓듯 하는 걸 보니, 기독교의 꼴이 참 우습게 되긴 되었나 보다. 얼마나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기 이런 주장이 화제가 될까?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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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3분간

2007. 3. 2. 18:05

아직 충분한 이성이 발달되지 않았을 중고등학교 시절 시절, 나는 물리학과 천문학에 빠져 있었다. 그때의 소망은 물리학도가 되어 평생 우주의 원리와 씨름하는 것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처럼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물리학이나 천문학을 선택했었다면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산업공학과를 나와 소프트웨어 업종에 근무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직 아쉬움은 남아있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파고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말이다.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나는 과학과 신앙이 마치 물과 기름과 같다는 당시 교회 어른들의 반응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과학과 신앙에 대한 내 태도는 25년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 이성을 최대한 사용해서 우주의 원리를 밝혀내야한다. 만약 그게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라면, 그렇게 침범당할 신이라면 이미 신이 아니다라고.

당시 내가 열심히 탐독하던 책중에 "처음 3분간"이라는 책이 있었다. 빅뱅 이론을 설명하면서, 빅뱅이 일어나고 난 처음 3분간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자세하게, 마치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듯이 쓴 책이였다. 재밌는 것은 책 저자가 생각이 나질 않아 인터넷을 뒤져보니 어릴 때 이 책을 읽고 과학도의 꿈을 키운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였다는 거다. ^^;;;

참고로 "처음 3분간"은 스티븐 와이버그가 쓴 책으로 최근에 "최초의 3분"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출판되었다. 나는 그 책을 일본 물리학자가 썼었다고 최근까지 믿고 있었는데 잘 못 알고 있었던 거다.

이 책에서 흥미로왔던 것은 빅뱅 이전의 상태와 빅뱅을 일으키게 만든 촉매에 대한 저자의 이론적인 고찰(거의 추측에 가까운)이였다.

알다시피 우주의 탄생은 빅뱅과 더불어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 빅뱅 이론이다. 그 이전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추측하는 것은 에너지를 담고있는 공간아닌 공간이라는 것이다. 공간은 공간이되 무언가 힘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 뭔가 불안정하면서도 그 상태로 몇백만년도 갈 수 있는 그런 공간. 안정되어 있되 동시에 불안정한. 그런 상태가 아니였겠는가라고 저자는 추측하고 있었다. 물론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빅뱅 이전의 상태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이 빅뱅을 일으켰을까라는 것에 대한 추측이다. 역시 이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빅뱅이론에서는 어떤 입자. 터널현상을 통해 무에서 유로 변환되는 최초의 입자. 그 책의 저자는 그 형태로 유력한 것이 빛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공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에너지 속에서 자그마한 빛이 그 불안정한 안정상태를 깨면서 빅뱅을 유발했다는 가정을 그 책에서는 담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창세기의 처음 부분과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에 창조 이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저자가 짐작하고 있는 빅뱅 이전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성경은 창조의 시작을 "빛이 있으라"에서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최초의 빛, 그것은 태양에서 오는 빛이 아니다. 왜냐면 해와 달은 나중에 창조되었다고 말하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빛"은 그 근원이 어디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빅뱅을 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했을 거라 추정되는 빛이 어울러져, 빅뱅이 성경의 창조론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면 성경이 세상이 6일만에 창조되었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최근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몇몇 만났다. 듣기로는 빅뱅이론을 싫어하는 무신론자들이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창조론과 흡사하기 때문이란다. 아이러니한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빅뱅이론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과는 안맞으니까.

최근에는 빅뱅이론에 대한 문제점 지적도 많다. 무신론진영과 기독교진영 양쪽에서... 다른 동기를 가지고. 하지만 과학적인 사실 추구가 계속된다면 빅뱅이 사실인지 아닐지 증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게 인간의 영역이라면 말이다.

우주의 근원을 생각하며 과연 신은 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빅뱅 이전에 이 세상을 디자인하고 빅뱅을 만들어낸 하나님.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최적화된 환경. 그 환경중 한두가지만 어긋나도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디자인했을테고, 신을 부정한다면 마땅한 답은 없지 않은가?

반대로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일까? 혼돈에서 현재의 세상으로 무수한 우연과 선택을 거쳐서. 창조과학자들은 그것이 물리학의 제2법칙과 위배된다고 하면서 말도 안된다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답일까? 누구 말대로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없고 의미 없는 것일까? 어차피 어느 한쪽도 뚜렷이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되는 신앙. 이성에서 출발하는 신앙을 꿈꿨었다.
근데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선택의 문제요, 받아들임의 문제라고...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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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기원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며 오래전 공부했던 내용들을 기억해내고 있다가,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할까 궁금해 창조과학회를 들어가 보았다. 올라와 있는 글들을 보며 받은 느낌은 대부분의 글들이 창조론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하고 있고, 또 진화론의 흠집내기에 굉장히 열심이라는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과학의 증거들과 성경에서 말한다고 여겨지는 것과의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무시하며 비기독교계에서 제시하는 증거들을 믿을 수가 없다라는 식의 주장은 또 다른 강요라 생각해서 실망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 중 내가 생각한 과학과 신앙의 조화에 굉장히 가까운 의견을 보았기에 여기에 싫어본다. 김창완이라는 분의 글인데 그분의 배경은 전혀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된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5&orderby_1=editdate%20desc

1. 진화의 의미

...영적인 측면에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은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앙, 계시와 철학을 혼합시키려는 시도로 비난받는다. 즉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말 자체 이미 '무기체의 신진대사', '기독교적 무신론' 따위의 말처럼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오버톤 판사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과학적 진화이론의 수용은 상호 배타적'이라는 창조주의자의 주장에 대하여서도 격분하면서, 이런한 의견은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견해에 대하여 공격적인 것'이라며 이를 반대했다.

'진화'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토론 당사자가 서로 상대방이 말하는 '진화'의 의미와 자신의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 토론은 공허하고 소모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 이전에 몇몇 '진화'의 정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의 1>> 진화란 유전자 풀(Gene Pool)에서의 시간에 따른 유전자 빈도수의 변화를 의미한다.

위와 같은 정의가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모양이다. 이러한 정의라면 확실히 '진화는 사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 창조과학자들을 포함해서 -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진화는 사실이다'라는 진술은, 예를 들어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 정의 1은 진화가 확실한 사실임을 보증하지만 기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전혀 없다.

진화의 다른 정의들을 살펴보기 전에 진화론에 대하여 진화론자들 자신이 한 흥미로운 분석을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Ernst Mayr에 따르면 다윈론은 다섯 가지 소이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다섯 가지 이론들이 세분할 수 없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고 한다. 그 다섯 가지 이론은 다음과 같다.

1) 진화 그 자체 : 이 이론은 세계가 항상 일정하거나, 최근에 만들어졌거나,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변화되고 있으며, 생물들도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이론이다.

2) 공동 후손 : 이 이론은 모든 생물 무리들이 공동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동물, 식물, 미생물 등 모든 생물들이 궁극적으로는 지구상에 단 한 번 나타났던 생명체에서부터 유래했다는 이론이다.

3) 종의 증가 : 이 이론은 엄청나게 많은 생물 다양성의 기원에 관한 이론이다. 즉,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게 될, 지리적으로 격리된 발견자 집단에 의해 한 종에서 두 자손 종이 만들어지거자,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이 만들어지게 되어 종의 수가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4) 단계주의 : 이 이론에 따르면, 진화적 변화는 개체군의 단계적 변화에 의해서 일어나지, 새로운 형을 대표하는 새로운 개체가 급작스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5) 자연선택 : 이 이론에 따르면, 진화적 변화는 각 세대마다 유전적 변이가 많이 만들어지고, 다음 세대로 전해진 유전 형질 가운데 특별히 잘 적응한 유전 형질의 조합을 지닌 상대적으로 작은 수의 개체들만이 살아남게 되어 다음 세대를 이루게 된다.

<<정의 2>> 진화란 일정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 2는 가장 넓은 의미로서 '우주의 진화'나 'The evolution of scientific creationism'이라고 할 때 사용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Mayr의 목록 중 1)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때의 '진화'는 정적인 세계관에 반대하는 모든 입장에서 사용할 수 있겠다. 사실 성경도 정적인 세계관에 배치되므로 이러한 '진화'는 성경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 1장은 - 정의 2의 의미로는 - 명백히 진화론적이다.

<<정의 3>> 진화란 모든 생물이 공동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한 종에서 두 종이 만들어지거나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이 만들어짐으로써 종의 수가 증가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지구상에 단 한 번 나타났던 생명체로부터 유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정의 3은 Mayr의 목록에서 1), 2), 3)을 합한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화'는 유신론적 세계관과 어떤 명백한 충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로 남기는 하지만 정의 3을 사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은 Intelligent Design Theory의 허용범위 안에 든다.

<<정의 4>> 진화란 모든 생물이 공동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자연 선택을 통하여 한 종에서 두 종이 만들어지거나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이 만들어짐으로써 종의 수가 증가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지구상에 단 한 번 나타났던 생명체로부터 유래하였음을 의미한다.

Mayr의 목록에서 4)는 5)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된다. 정의 4는 정의 3에 5)을 합한 것이다. 자연 선택은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Phillip Johnson에 따르면 자연 선택은 자연주의로부터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결론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연 선택이 신학적으로 허용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 자연 선택의 문제는 - 유신론적 진화론 논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정의 5>> 진화란 모든 생물이 하나님 없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렇게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러한 의미가 완곡하게 표현되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진화'라고 말할 때 그 마음 속으로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인 경우가 많다. 정의 5는 명백히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철학적 진술이며 기독교인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도 정의 5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럴 경우 그것은 실로 '기독교적 무신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 창조과학 비판

창조과학은 인간의 기원, 지구의 연대, 그리고 지질학적, 생물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분명하게 사고하는 일을 어렵게 만듦으로서 복음주의에 손상을 주었다. 그러나 창조 과학이 초래한 더욱 심각한 악영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잠식한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한결같이 창조과학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Heckenlively는 그의 글 'Scientists Who Keep the Faith'에서 창세기 문자주의(Genesis Literalism)의 4가지 형태를 다음과 같이 썼다.

(1) 구획화 (Compartmentalization) : 과학이 말하는 바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사이의 모순을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경우.

(2) 과학에 대한 불신 (Distrust of Science) : 그 자신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증거를 믿기를 거부하는 경우.

(3) 증거의 선택적 사용 (Selective Use of Evidence) : 선입견에 부합하는 증거는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증거는 무시하는 경우. (그는 이러한 일이 진화론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도 언급하였다.)

(4) 과학에 대한 무지 (Ignorance of Science) : 과학적 결과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지 모르는 경우.

이 중 특히 (3)이 창조과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같은 글에서 창조과학자들이 선택적으로 무시했다고 보는 증거들- 대진화의 증거들 -을 나열하고 있다.

(1) 소진화 (Microevolution) : 종분화(speciation)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 있으며, 이것을 널리 받아들여지는 '균일설(uniformitarianism)'과 함께 생각하면 대진화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2) 화석 (Fossils) : 우리는 많은 화석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는 어류와 양서류, 양서류와 파충류, 파충류와 조류, 그리고 파충류와 포유류 사이의 전이형태들도 있다.

(3) 살아있는 전이형태 (Living Intermediates) : 명확히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알기 어려운 살아있는 전이형태들이 있다. 예를 들면 Coelacanth와 같은 것이다.

(4) 유전적 유사성 (Genetic Similarity) : 여러 생물 그룹의 DNA는 그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자의 98%가 같다.

(5) 철학적 지지 (Philosophical Support) : 과학철학에 따르면 가설이 이론의 지위를 얻으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론들과 성공적으로 관계지어져야 한다. 대진화는 유전학, 집단유전학, 생리학, 생태학, 지질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고생물학 등과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된다.

이 외에도 연대문제에 대하여 또는 지질학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지엽적인 문제 외에도 근본적인 비판도 있다. 이는 창조과학이 '간격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종 창조과학은 이와 다소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나 그러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러면 여기에 대하여 알아보자.

 

III. '간격의 하나님(God of Gaps)' 입장

If in fact the frontiers of knowledge are being pushed farther and farther back (and that is bound to be the case), then God is being pushed back with them, and is therefore continually in retreat. - Dietrich Bonhoeffer

나는 자연적 원인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덮기 위하여 초자연에 호소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의 과학이나 신학을 승인하지 않는다. -Asa Gray

번개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 옛날 사람들은 번개가 신의 진노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입장을 '간격의 하나님'의 입장이라고 부른다. 이 입장은 두 가지 큰 (한 가지라도 치명적일 만한) 약점이 있다. 위에서 인용한 Bonhoeffer의 말처럼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 우리의 지식이 점점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위한 간격은 점차로 없어져 결국에는 하나님이 필요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명백히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사건을 통하여도 일하시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반드시 초자연적인 사건을 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약점은 이러한 입장이 과학의 발전을 막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현상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의 결과로 돌려버리면 더 이상 그 현상의 메커니즘이나 자연적 원인을 찾는 것은 무의미해지므로 그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할 수 없게 만든다. 탐구를 가로막는 견해는 가장 나쁜데 왜냐하면 어떤 견해가 주어졌을 때 이어지는 탐구를 통하여 그 이론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탐구를 할 수 없다면 그 견해를 수정, 보완, 발전 시킬 수도 없다. 아무리 잘못된 견해라도 탐구를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교정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탐구를 가로막는 견해는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정반대의 입장으로서 일부 기독과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IV.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

우리가 어떤 자연현상에 관하여 자연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설명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다. 과거의 수많은 과학적 수수께끼가 해결된 지금의 시점에서도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자연적인 원인을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아주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방법론적 무신론(Methodological Atheism)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입장은 위와 같은 '간격의 하나님' 입장을 피하고자 과학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오로지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만 설명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간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과학에 있어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세상이 자연적인 원인에만 묶여 있을 필요가 없을텐데 과학이 반드시 모든 것을 자연적 원인에만 돌려야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상당히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경우라고 못박는 것은 오히려 탐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J. P. Moreland는 그의 글 'Creation Science and Methodological Naturalism'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주된 옹호자로 Paul de Vries와 Howard J. Van Till울 지목하고 그들이 말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4가지 중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자연과학의 목적 (The goal of natural science) : 자연과학의 목적은 사건을 (자연적인 사건만을 의미함) 물리적 원리와 법칙과 장(field)의 설명적인 문맥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2) 방법론적 자연주의 vs.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metaphysical naturalism) :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또는 철학적 자연주의)는 서로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3) 자연과학적 설명 (Natural scientific explanation) : 과학은 사건을 단지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라는 질문에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가지고 대답한다.

(4) 통합과 섭리의 상보적 관점 (A complementarian view of integration and agency) : 과학과 신학은 상보적이다. 그것들의 대상은 다르거나 또는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이다.

 

V. Howard J. Van Till의 견해

This is a Creation endowed with functional integrity. The Creator has equipped it to do whatever He calls upon it to do. It suffers no gaps of dificiencies in its economy that need to be bridged either by words of magic or by the Creator's direct manipulation.

Van Till의 견해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functional integrity이다. 예를 들어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자.

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 1: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 1: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각각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땅 또는 물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부르신다. Van Till의 견해에 따르면 이 때 하나님은 마술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어떤 강제적인 능력을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원래부터 부여된 역량을 발휘하도록 부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순간에 창조를 하실 때에 불완전하지만 원래 의도한 형태로 형성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채우고 있는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부여하신 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Van Till은 이러한 견해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가이사랴의 성 바실(St. Basil of Caesarea; 330-379)의 저작 'HEXAEMERON'과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의 저작 'DE GENESI AD LITTERAM(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을 인용한다.

 

VI. 유신론적 진화론 비판

첫 번째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점이다. 즉, 죽음과 투쟁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다르다는 점인데 창조 당시 이와 같은 죽음과 투쟁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셨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간격의 하나님이 되고 있다는 문제점이다. 세 번째로 기독교의 중심적인 가르침인 창조, 타락, 구속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네 번째로 죄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로 성경적 연대기를 진화론자들의 연대기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여섯 번째로 창조의 개념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비판은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다만 주의할 것은 정의 3을 사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과 정의 4를 사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의 4에는 비판이 되지만 정의 3에는 성립하지 않는 비판도 있음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정의 4를 사용하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많이 접해 보았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주목할 만한 비판들은 주로 성경해석적 또는 신학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타락'의 문제일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틀에서는 아담의 타락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겠는가? 창세기 1장의 날(욤)이 태양일이냐 긴 기간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타락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언급한 바 있는 '자연 선택'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자주 제기 되는 문제 세가지를 열거해 보았다.

<1> 무작위적(random)인 변이는 자연의 작동이 우발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다윈을 좇아 우연에 호소하고 있다.

<2> 생존경쟁을 하여야 하고 그 중 대부분은 고통당하고 경쟁에서 패하여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은 약한 것에 대한 우주의 기본적인 잔인성을 지적한다.

<3> 자연선택은 무의식적인 과정이라는 점은 우주가 맹목적이고 생명이나 인간성과 같은 것에는 무관심하다고 암시한다.

요컨대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쓰실 만한 것인가 하는 점은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다.

 

VII. 결론

나는 철학적 유신론자이며 기독교인이다. 하려고만 한다면 무로부터서도 창조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연적 진화과정을 통하여 창조작업을 완수하기로 작정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그것은 비록 여러 가지 성격해석학적 신학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전적으로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신론적 진화론과 관계된 논의는 '진화'의 불분명한 의미로 인해 비생산적인 토론이 되어왔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적어도 가능한 한 대안으로는 취급받아 마땅하다.

열린 마음을 가지되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진화론은 - 유신론적 진화론을 포함하여 - 무조건 안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비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밝히기 전에 먼저 그것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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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올렸듯이 찰스템플톤의 글을 읽고 있다. 책의 시작을 매우 기본적인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신들이 있다. 당신이 믿고 있는 신은 이전 사람들이 믿었던 신에 불과하다." 미국에는 기독교가 대세고, 중동에는 이슬람이 대세다. 그럼 당연히 대세인 종교를 믿게 되는 것인데 도데체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질문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가 보다. 오남강 교수도 그의 책 "예수는 없다"를 '우리 아빠 최고' 신드롬으로 시작을 했다. 어린 아이들이 모여서 우리 아빠가 최고라고 자랑을 한다. 어릴적 아이들에게는 그럴듯한 직장다니며 멋진 차 끌고 다니는 아빠가 최고였을거다. 아니면 운동을 잘해 동네 운동회에서 상을 휩쓰는 아빠가 제일 멋졌을거다. 하지만 의식이 성숙해서 세상을 둘러보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 "아빠"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아빠(여호와)는 너희 아빠(지리산 산신령)보다 지적이고 힘도 더 세단 말이야... 라고 해봐야 그건 성숙하지 못한 의식이 아닌가. 이성을 가지고 접근하면 모든 종교는 거기서 거기인데, 기독교 제일주의는 일종의 제국주의라는 비판이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정말 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란 해석.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포함) 는 유대민족의 종교에서 시작한 것이고, 다른 종교들도 다 각 민족 혹은 지역별로 생겨난 것이다. 신이란 문화적인 창작품에 불과하고, 그 신은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그 설명이 타당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다른 종교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래서 인간은 신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는 세상에 그의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의 원칙들이 세상 원리에 나타나 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여호와는 오직 그의 선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었고, 다른 민족들은 자신들의 지식 한도내에서 신들을 만들어내었다.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공통적으로 신을 닮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양심이라 표현되는 것이다. 신이 없다면 왜 인간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일까? 그냥 우연히? 아마도 신을 바라는 것은 인간과 이 세상이 우연의 결과라는 주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의 해석에 대해서는 왜 여호와는 유대인에게만 나타났었는가라고 질문하고 싶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범답안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납득은 안간다. 모든 민족을 다 상대하지 못하고 유대인만 상대해야했을만큼 여호와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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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여행이라는 이름을 걸고 치열한 질문을 준비하던 중 "세종대왕은 천국에 갔을까"라는 글을 접했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로 한다면 세종대왕은 천국에 가지를 못했고, 그게 맘에 안들지만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종교'란 다른 차원의 것이며 해결방법은 '믿음'뿐이기 때문이다.

비기독교인, 혹은 무신론자들이 보면 이해가 안되고 반감이 갈만한 내용이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논점이 이해는 된다. 두호리님의 논점은 믿음이란 '논리'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이고, 기독교인은 '비논리적인 경험'에 의해 예수를 신뢰하고 천국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충분히 공감이 가는 글이다. 나도 그런 '비논리적인 경험'을 무수히 해왔으므로...

하지만 뭔가 마음이 무겁다. 정말 그러한가. 믿기 위해서는 '논리'나 '이성'을 포기해야하는가? 꼭 그렇지야 않겠지만 두호리님의 글을 보면 애초부터 '논리'와 '믿음'은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논리적인 분석은 접어두는 것이 낳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정말 그러한가... 난 인정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 분이 계시다면)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다. 어떠한 주장을 가설과 진실로 나눈다면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은 가설이요,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이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왜냐하면 전자는 모두가 납득하는 것이 아니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생각할 수 있는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이성을 인간에게 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성을 사용해서 '믿음'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것이 죄라면 이전 글에도 말했듯이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방임이다.

'믿음'과 '이성'에 대해 상반된 두개의 주장이 있다.

"조금이라도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기독교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 조지 스미스

"크리스찬 믿음은 반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주장은 이성과 증거에 의해 뒷받침되는 타당한 제안이다" - 찰스 콜슨

누구의 말이 옳을까? 나는 아직도 '이성'과 '믿음'이 공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이성을 사용해서 끝까지 내가 가지고 있던 믿음에 대해 질문을 할 것이다. 만약 공존할 수 없다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굴복시키겠지만, 처음부터 한쪽을 선택한다는 것은 게으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분명히 믿음에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논리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믿음이 이성을 죽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맹목이지 참된 믿음이 아니다.

참고로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다. "세종대왕이 천국에 갔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모범답안은 "모른다"이다. "가지 못했다"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속성이 세상 만물을 통해서 드러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사람들이 반응을 하는지 안하는지 예수가 전하여지지 않았을 때에도 핑계치 못할 것이다라고 말을 한다. 그 이야기는 예수가 (그 이전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전하여지지 않았을 때에도 하나님의 판단기준은 있었다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 말을 해주지 않는다. 또 세종대왕이 만물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어떻게 반응을 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세종대왕이 천국에 갔는지 안갔는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기회도 주지 않고 무조건 지옥으로 보낸다면, 그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고 경외할 가치가 없는 폭군일 뿐이니까.

이 대답이 내가 찾은 '이성'적인 대답이요 대부분의 복음적인 크리스찬들이 사용하는 대답이다. 그렇다. 나는 아직도 이성과 믿음이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내가 빌리그래함이 그렇듯 "내 머리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해도 당신의 말씀이니 믿겠다"고 할지, 찰스템플톤이 그랬든 "그 행위가 마음을 닫는 이성의 자살"이라고 하며 더 이상 크리스찬이 되기를 거부할지는 나는 아직 모른다. 그건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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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 대한 비판중에 가장 큰 항목이라면 기독교의 배타성일거다. 나는 기독교가 정말 배타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교리를 보면 배타적일 수 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에 대한 배타성은 나중에 다시 한번 적어보고 싶고, 오늘은 예수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기독교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간중에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한사람이 예수라는 것에는 부정하지 않을 것 같다. 예수의 전기라 할 수 있는 사복음서 공통적으로 예수의 공생애(공적으로 활동한 기간)를 삼년이라고 한다. 30살부터 33살. 마흔이 된 내가 돌아보면 설흔 즈음의 나는 아직도 파릇파릇하고 ^^ 철이 없었던 나이였다. 그런 적은 나이에 고작 3년, 그리고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변방에서 주로 활동했던 한 사람이 이후 이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 어찌 보면 기적의 하나라고 생각이 든다.

예수에 대한 해석도 참 많다. 이천년전의 인물이고 또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모습이 제한적인 시각만을 보여주다 보니, 예수라는 한 인물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없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는 구세주로, 어떤 이는 혁명가로, 어떤 이는 현자 중의 하나로, 예수에 대한 해석도 다 제각각이다. 인간이다 아니다, 신이다 아니다, 결혼을 했다 안했다, 사생아다 아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가 이렇게 다양한 면에서 다양하게 해석되어지는 인물이 있을까?

소위 기독교인들이 강조하는 몇가지 기본적인 교리가 있다. 기독교안에 많은 교파들이 있으면서도 어떤 파는 이단이다, 어떤 파는 이단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이 몇가지 교리를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그 중에 예수에 대한 교리라 한다면 1) 예수의 동정녀 탄생 2) 예수의 신성과 인성 3) 예수의 죽음 4) 예수의 부활 5) 예수의 승천및 재림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본적인 교리를 보면 예수는 분명 보통의 사람과는 분명히 달라야 한다.

하지만 그런 시각을 배타적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를 다시 해석해야한다는 주장은 끊임없이 계속 되어왔다. 뭐 그리 배타적으로 해석할 필요 있냐? 예수라는 인물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지만 신이라는 것은 좀 믿기 힘들지 않냐? 그냥 좋은 교훈을 제공하는 현자의 하나로 해석을 하자... 라는 주장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는 싫어하지만 예수는 좋아하기도 한다. 그뿐인가. 정통 교회라는 곳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교회 왜 다니냐고? 그냥 좋은 말씀 듣고 나면 사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보기에 교인들중 30%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더 될 수도 있고.

합리주의와 인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예수를 인간의 이성을 사용해서 재해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찌 보면 좋은게 좋은 거라고 하는 관점일 수도 있다. 또 기독교의 배타성으로 인한 폐해를 보면서 제시하는 합리적인 절충안일 수도 있다. 모든 종교가 다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예수의 가르침도 사랑하라는 것이니, 그냥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이야기 중의 하나로 여기자는 생각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나는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예수에 대해서는 모 아니면 도다. 결론부터 말하면 예수는 미친 사람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C.S. 루이스라는 크리스찬 지성인 (이런 표현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정말 멍청한 말이 있다. 난 그 말이 다시는 안나왔으면 좋겠다.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인 선생으로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를 하나님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정말 말이 안되는 말이다. 만약 그저 인간이기만 한 어떤 사람이 예수가 한 거와 같은 말을 한다면 그는 도덕적 선생이 될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는 미쳤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정도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선택을 해야한다. 이 예수라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아니면 정신병자 혹은 그보다 더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우리는 그를 미쳤다고 입을 다물게 하고, 침을 뱉고, 혹은 그를 죽여버릴 수가 있다. 아니면 그의 발에 엎드려 그를 주님 혹은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잘봐주는 척 하면서 예수가 위대한 스승이라고 하는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말을 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그런 선택권을 남겨주지 않았다. 그는 절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말을 기록한 것이 성경이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모습이 후세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발견된 기록의 양과 발견시기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초기 기독교(예수의 죽음 이후 2~30년 내외)의 기록과 거의 같다는 주장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디. 성경이 제대로 보존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집중적으로 파고 들 생각이다.

어쨋든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발언을 놓고 보면 다음의 사실들을 알 수 있다.

1.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 베드로와의 대화, "나를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를 부인하는 자"라는 발언, 대제사장앞에서 심판 받을 때의 발언, 당시 유대사회에서 하나님을 '아바'라 불렀다는 점등, 예수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다는 증거는 복음서에 널려 있다.

2.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바리새인들과의 대화중 하나님에게만 쓸 수 있는 표현인 "I AM"이라는 말로 자신을 표현한점, 하나님만이 할 수있다고 여겨졌던 "죄를 용서한다"고 말한점등, 예수는 분명히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생각했다.

3. 예수는 자신만이 구원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요한복음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표현,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구원의 근원임을 이야기한점, 자신의 죽음이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의 확립등, 예수는 자신이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왔음을 확실히 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런 발언을 지금 세상에서 했다고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평판이 좋은 사회운동가가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자신의 측근들과 힘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부패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를 주며, 타락한 권력층을 비판을 한다. 참으로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끔 가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래도 이 사람을 세상에 도움을 주는 도덕적 스승으로 모실 것인가? 아니면 사회운동가? 성인중의 하나... 넌센스다.

나는 아직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니면 정신병자인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하다. 둘 이외의 다른 선택은 없다. 예수에게 굴복하던지 아니면 완전히 무시하던지.

예수를 좋은 말 몇마디한 성인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넌센스도 없고, 예수를 구세주라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교회 생활하는 것만큼 인생의 낭비도 없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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