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블로그를 중지한 이후 포스팅을 하는 Future Shaper! 에 올렸던 포스팅입니다. 이 블로그를 마감하며 몇년간 지속되었던 신앙의 여정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가를 기록하기 위해 이 블로그에도 포스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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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멍의 '나는 학생이다'를 읽고 있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학생'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관리, 작가, 농부의 생활을 했지만 그중 어느것도 자신을 제대로 규정하지 못하며, 돌이켜 보건데 그는 항상 학생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학생'이라 단정짓는 그의 단호함이 부러웠다.

내가 무엇인가하는 고민 뒤에 이 책을 읽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를 '무엇'으로 규정할 것인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아직 살아온 날 못지 않게 남은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정의에는 지금까지 삶에 대한 고백도 있겠지만, 이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의지의 부분도 있다. 지금까지의 길을 정리하는 것임과 함께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겠다는 결단이다.

나는 엔지니어인가 질문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오랫동안 엔지니어로서의 삶을 살았다. 엔지니어 특히 프로그래머가 좋았고, 평생 그 길을 가고자 미국에 건너왔다. 하지만 계기가 있어 엔지니어보다는 매니저의 삶을 선택했다. 엔지니어링 마인드는 항상 가지고 살겠으나 엔지니어라 부르기에는 실제 기술에서 너무 떨어져있다. 나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매니저인가? 그렇게 부르기에는 아직 매니저로 보낸 시간이 전체 인생에 비해 짧다. 그리고 지금 계획하는 일이 성공한다면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남은 생애 무엇을 할지 모르기에 매니저라 부르기도 힘들다.

나는 작가인가? 글과 사진을 좋아하고 언젠가 글과 사진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나, 작가라 부르기에는 시간과 경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적지 않은 관심을 쏟기는 하나, 주업에 비하면 우선 순위는 한참이나 밑이다. 나는 작가는 아니다.

40년 남짓한 인생중, 18년을 학교 생활을 했고, 미국에 와서도 MBA다 뭐다 하면서 3년 넘게 학교를 다녔으니 '학생'이라 나를 규정할 수 있을 법 하다. 평생 공부하며 살겠다는 것이 내 주장이기도 하니 '나 학생이다' 선언할 수 있겠으나... 뽀대가 안난다. 따라하는 것은 왠지 캥긴다 ㅡ.ㅡ

그러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5학년 때 교회에 발을 들인 이후 30년 가까이 내가 크리스찬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년간 진리를 확인하고 싶어 신을 부정하고자 노력한 적도 있었고, 지금도 성경의 모든 것을 이성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내 생각 근본에서 기독교적 가치관이 떠났던 적이 없다. 한국 기독교의 썩어 있는 모습울분을 쏟는 이유도 '내가 크리스찬'이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선이 있다고 믿으며 또한 논리적으로 추론하여 인정한 다. 또한 세상에는 내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존재함을 경험하여 알고 있다. 세상은 신을 빼고 설명할 수도 있지만, 과학적 가설의 조합보다 절대선을 통한 설명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절대선이 존재할 때, 귀결점은 인격신이라는 논리에 찬성한다. 인격신이 존재한다면, 그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인류에 평화와 소망을 주길 원할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그 인격신에 가장 근접한 모습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라는 결론을 내렸다. (충분한 비교가 없었기에 기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라고 단정짓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가 가장 쉽고 확실한 길임을 믿는다.)

나는 기독교에서 제시하는 구원관을 믿는다. 예수의 오심과 죽으심, 부활하심이 거대한 시나리오에 맞추어진 꼭 필요한, 그러면서도 참으로 감사한 사건임을 믿는다. 그 예수의 가르침이 이 세상을 더 낳은 곳으로 만들 것임을 믿으며, 더불어 그에게는 단지 '좋은 선생'을 넘어선 신적 초월성이 있음도 믿는다. 그를 따라가며 '거룩'해지는 것이 내 삶의 목표이며 그게 내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임을 믿는다.

그렇다. 나는 크리스찬이었고, 크리스찬이며, 앞으로도 크리스찬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게 나의 정체성이다. 그가 열심히 살라 하였기에 나는 내 직업에 충실할 것이고, 그가 거룩하라 하였기에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가 사랑하라 하였기에 내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것이며, 그가 남을 도와주라 하였기에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애쓸 것이다. 그가 희생을 보여주었기에 나도 희생을 치를 수 있는 단계에 이르도록 그를 닮아갈 것이다. 지금까지 부족했기에 앞으로 더 열심을 낼 것이며, 또한 도움을 청할 것이다.

나는 크리스찬으로서의 내가 좋다. 그리고 그 사실이 참으로 감사하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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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

영적인 것보다 당장 급한 것들에 더 신경을 쓰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은 그래서 조금 소강상태에 있었네요.

이성적으로 옳고 그르던... 하나님 없다고 생각하니 힘들었습니다.

이제 그 분과 다시 한번 대화를 나눌려고 합니다.

더이상 침묵하지 않으시길 바래야겠지요 ^^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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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대표적인 무신론자중의 하나로 알려진 David Mills의 책으로 현재 무신론에 관한 책중 가장 많이 팔려지는 책이다 (Amazon 기준). 그리고 이 책을 추천한 사람은 또한명의 대표적인 무신론자인 칼 사강(Cosoms의 저자)의 아들인 Dorion Sagan이다. 쉽게 말해 무신론에 관한한 정통파이며 무신론의 바이블 ^^ 이라 할 수 있다. 밀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아홉살때에 예수를 영접했고 고등학교까지는 신실한 신자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전도를 하다가 한 친구가 기독교 신앙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면 믿겠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증거를 찾아나섰단다. 하지만 무신론자 친구를 설득하기 위해 스스로 증거를 찾을수록, 신앙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신이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할려고 했던 그 당시의 창조과학 서적들은 다 논리적 모순에 빠져 있었고 이성적으로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신앙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결국 과학이 성경에 반대되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며 무신론으로 돌아섰다. 나사(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를 담당했던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이 더욱 더 과학을 신앙보다 우선하도록 만들었을 것 같다.

무신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이 책은 거의 모든 지면을 기독교 신앙에 반대하는 것에 할애하고 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생각하는 사람들의 대답"이라는 부제가 말하듯이 이 책은 기독교에 대해 상당히 도발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말하는 논점들이 꼭 기독교에만 대응하는 것은 아니며, 모든 종교에 반하는 무신론적 주장이다. 이전에 읽었던 찰스템플턴의 책-(Farewell to God)에 비하면 이 책은 훨씬 잘 쓰여져 있다. 논리적이다. 템플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내 신앙에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던 것에 비해서 이 책은 충분히 나의 신앙을 흔들어 놓고 남음이 있다. 영어식 표현으로 하면 "He Got Me"이다. 앞으로 오랜 동안 나는 밀스가 내어놓은 질문들과 씨름할 것 같다.

이 책은 인터뷰와 다섯개의 큰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 나오는 인터뷰는 왜 그가 무신론자가 되었는지, 왜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지, 기독교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 등등 그의 주장들을 전반적으로 담고 있다. 그 내용들을 뒤에서 자세하게 서술하는데, 첫번째 주제는 왜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데 신이 필요하지 않은가이다. 두번째는 진화의 증거들이 창조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내용이다. 세번째는 기적에 대한 반응에 대한 것이고, 네번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지옥을 만들었을 것이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등장하는 Intelligent Design (ID)에 대한 그의 반론이다. 이외에 인터넷에서 포르노를 못보게 하는 법안에 대한 그의 생각과 미국이 기독교 사상에 기초한 국가가 아니라는 주장을 담았는데, 이 내용들은 차라리 안들어가는게 낳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기독교라고 표기한 부분은 전반적인 그리스도에 근거한 신앙을 말한다. 이책에서 이야기하는 기독 종교는 개신교와 천주교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 - 신이 필요한가?]

우주의 기원에 대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것에는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13세기에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한 것이며, 이후 물리 법칙중 하나인 "작용-반작용"의 법칙과 합쳐져서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듯이, 근본적으로 우주도 그 원인이 되는 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주장은 꼭 종교적인 주장이라기 보다, 누구나 한번쯤은 질문을 해봤을 내용이다. 세상은 도데체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저절로 아무 이유없이 되었다고 한다면 아무래도 잘 납득이 안가게 된다.

이에 대해 밀스는 두가지 이유를 들어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신의 필요를 증명한다는 주장에 반대를 한다. 첫째, 과학의 법칙은 일반적인 것이지 그것이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법칙은 현상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지, 그 자체가 원인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법칙만 있다고 해서 과학은 아니다. 과학이라 말할 수 있으려면 법칙을 기반으로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 설명을 할 수가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인들이 우주의 시작에는 원인이 있어야 하며 그 원인은 신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과학의 법칙을 잘못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밀스는 다른 과학의 법칙을 들고 나온다. 그것은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다. 그 법칙은 질량과 에너지는 상호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유명한 아인쉬타인의 E=MC2가 이 법칙을 위한 공식이다. 빅뱅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생성이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없었다. 즉 질량이라 할만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밀스는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이전에는 에너지가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을 한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에너지가 있을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있다. 이런 "질량-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있지 않는한, 우주는 무한한 예전부터 있어왔고,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형태만 변할 뿐이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주장을 찬찬히 보면 그가 자신이 말했던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용-반작용"이 현상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듯, "질량-에너지 보존"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해석이다. 둘다 그에 반하는 증거가 없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작용-반작용"이라는 법칙만 주장하지 그 중간을 메워주는 설명을 집어넣지 못한다고 비판했는데, 마찬가지로 그도 질량-에너지는 계속 보존될 것이라는 주장만 하지 그 법칙이 우주의 탄생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빅뱅이 에너지뿐이였던 우주를 현재의 우주로 변환시켰다면, 그 원인이 되는 빅뱅의 시작에 대해서는 설명을 못하고 있다.

따라서 "질량-에너지 보존"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한 백번은 나온 것 같다 ^^)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대로 "우주 탄생에 신이 필요없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그의 주장은 수긍하기 어렵다. 우주의 기원에 대한 비합리적이지 않은 무신론적 주장이 하나 있다라는게 내가 받은 인상이다.

[간격의 하나님 (God of Gaps)]

우주의 기원에 대한 논쟁에 더불어 그는 간격의 하나님을 언급을 한다. 이전에는 인간들이 자연현상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을 들어 설명하려 하였지만, 과학과 이성이 발달하면서 신이 필요한 부분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이런 현상은 앞으로 갈수록 줄어들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인간이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신을 들어 설명을 했지만 언젠가는 명확한 과학적인 설명이 생길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간격의 하나님식의 접근방법에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와 관련 역사속에서 기독교와 천주교는 많은 잘못을 저질렀고, 또 지금도 종교라는 이름으로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종교의 이름으로 과학을 막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과학이라는 아니 넓게 보아 모든 학문이 한가지 주장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100% 맞다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증거를 수집하고 계속해서 진리를 찾아나가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종교가 진정한 진리라면 과학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나올 것이고, 또 그래야만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종교일 것이다. 과학에 침범당할 신이라면 그건 벌써 신이 아니니까.

그렇기에 방법이 비인격적이 아닌 이상 과학적인 탐구는 어느 것에서든 종교의 이름으로 제한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의견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진화론 연구를 할 수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진화론을 끝까지 연구해서 신이 정해놓은 한계를 만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신을 발견한다면 그게 신이 정해놓은 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학과 종교가 서로 불편해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진정 신이 있다면 진정한 신의 영역은 신의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모든 간격을 없애는 것도 신이 준 소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진화론 vs. 창조론]

우주의 창조및 생명의 기원에 대한 기독교적 접근 방법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다.

첫번째 접근방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6일동안 이 세상을 만드셨고, 7일째는 쉬셨다. 그때 하루는 말 그대로 24시간인 하루이다. 아담이 언제 셋을 낳았는지도 나오고, 또 계속해서 언제 자손을 낳았는지가 나오므로 이를 계산하면 언제 세상이 창조되었는지 계산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신학자들이 언제 세상이 창조되었는지 이를 기반으로 계산을 했다. 사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대략 6000년 정도로 계산이 된다. 지질학이 발달되기 전까지, 그리고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기술이 나오기 전까지 아무도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과학적인 방법을 계산해서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면 지구가 약 45억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온다. 그렇다면 누가 맞는 것일까? 전에는 탄소연대측정 방법에 대해서 인정 못하겠다는 주장이 많았다. 그래서 거북이등의 나이를 계산하니 200만년이 나왔다는 등의 과학의 결과를 통째로 못믿겠다는 말들도 기독교계에서 주장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탄소연대측정이 일관적인 결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대로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일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한꺼번에 생성되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지층에 나타난 화석들을 보면 일관적으로 초기 생명체부터 더 진화된 생명체로 순서대로 일관되게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연에서 보여지는 증거들은 확실히 진화론의 편이지 창조론의 편이 아니다. 일부 창조과학자들은 지금 발견되는 화석들이 노아의 방주사건 때에 한꺼번에 땅속에 뭍히면서 생긴 것이다라고 주장을 한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런 주장은 기독교인인 내가 봐도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어떻게 물에 휩쓸린 생물체들이 차곡 차곡 그것도 지구 전역에 걸쳐서 차례대로 뭍힐 수 있을까? 인간은 위험에 대해 인식을 하고 피하려는 본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서 나중에 뭍혔다고 하지만, 지구상에는 올라갈 산이 없는 평지도 상당하다. 그들이 어떻게 다 산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진다면 물 속에서 오래 살 수 있는 어류 종류가 가장 나중에 뭍여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와 더불어 밀스는 이 책에서 진화론에 반하는 창조론자의 질문들에 대해 하나 하나 반박을 한다. 예를 들어 화석은 순서대로 여러 시기에 발견이 되지만 유독 캄브리안기에 많은 화석이 발견된다. 그래서 이 시기를 창조의 시기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캄브리안기 이전에도 생명체는 발견되었고, 또 캄브리안기에는 아직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는 발견되지 않았다.

중간화석에 대한 진화론자의 반박도 담고 있다. 진화론에서 A에서 B로 종이 변하는 것을 주장하면 창조론자들은 그 중간화석이 어디 있냐고 반박을 해왔다. 이에 대해 밀스는 진화론자들이 A와 B의 중간인 A'를 발견하면 창조론자들이 A와 A', A'와 B의 중간 화석을 요구한다고 불평을 했다. 아무리 합당한 중간화석을 증거로 제시해도 창조론자들은 수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경우, 자연에서 보여지는 진화의 증거들을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게 된다.

두번째 접근방법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6일동안 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이 지구도 6000년전에 만든 것이 아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는 모든 사람을 담은 것이 아니고 중요한 인물들만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밀스는 성경의 표현 - 누구는 얼마를 살았고 몇살에 자식을 낳았다 - 은 누가 봐도 실제적인 족보를 담은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런 주장에 반박한다. 또한 성경의 일부를 과학적인 증거에 밀려 임시적으로 다르게 해석한다면, 즉 성경의 해석이 경우에 따라 달라진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바빌론 문명의 기록이 남겨진 최초의 시기가 6000년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며 결국 성경이 제시한 인류와 지구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바빌론 사람들의 제한적인 이해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을 한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확실히 과학이 밝혀낸 증거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창조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창조론에 입각해 진화론을 반박하는 글들을 많이 봤지만, 솔직히 말해 수준의 차이가 너무 난다. 창조론자들의 이야기는 내가 봐도 억지가 많고 진화론자의 이야기는 밝혀진 증거에 의한 담담한 설명을 담고 있다.  진화가 "어떻게" 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른 과학자들이 많겠지만 적어도 진화가 "있었다"라는 점에서는 과학자들 사이에 별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진화의 증거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부분이 나의 신앙에는 어떠한 영향을 끼칠까? 솔직히 말해 진화대 창조에 있어 내 이성은 진화의 편을 벌써 들고 있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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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눈 기억이 있다. "세상 모든 종교가 다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고,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라고 말을 한다. 내가 보기에는 다 거기서 거기다". 나는 이렇게 말을 했다. "그건 구원이라는 것을 배제하고 봤을 때이다. 종교에 구원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구원의 문제에 관한한 모든 종교는 다 다른 것이다".

정말 그렇다. 종교마다 제시하는 궁극적인 목표나 구원의 방법은 다 다르다. 어느 종교든지 구원의 방법에 관한한 폐쇠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경우는, 예수의 경우는 다르다. 기독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명시적인 선언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라고 믿는다. 종교마다 각각 다른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기의 종교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과연 그런가? 예수 이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인가?

우리는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자기가 회사에서 가장 일을 잘하고, 또 자신이 높은 자리와 높은 연봉을 받아 마땅하다고 지속적으로 주장을 한다면. 설사 그 사람이 능력이 많다고 하더라도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느껴질 것이다. 하물며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구원의 문제에서 기독교처럼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다. 그를 믿지 않는자는 다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말한다면 일단 반감부터 생길 수 밖에 없다.

이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중에 제일 큰 이유는 그 주장이 독선적으로 들린다는 것과 또 공평하지 않게 여겨진다는 것이다.

절대로 '절대'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Never say 'never')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특히 현대사회처럼 개인의 자유와 다양성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흔히 사용하는 비유가 있다. 산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사람들이 닦아놓은 등산로를 통해서 올라갈 수도 있고, 또 어떤 이는 암벽을 등반해서 어렵게 올라갈 수도 있다. 하다못해 헬리콥터를 타고 산 정상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종교의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는 방법도 종교마다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평성의 문제 또한 답이 필요하다. 예수를 모르고 살았던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또한 세상에는 아직도 예수가 전달되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은 그럼 자동적으로 지옥에 간다는 것인가? 윤리적인 측면은 어떠한가? 간디와 같이 누가 봐도 숭고한 삶을 산 사람이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갔다고 하는데, 세상에 대한 적대감 하나로 17명을 죽인 김대두 같은 사람이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에 갔다고 한다면 뭔가 불공평한 것 아닌가?

요즘 같은 세상에 정말 예수만이 답인가? 다른 곳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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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못 내릴 것 같다.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생각하고 읽어보고, 또 여러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지만, 양쪽 다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분명히 진화론은 생명의 기원에 대한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우주의 기원에 대해 생각할 때, 신의 존재를 생각하게 되듯이,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 누군가 design한 자가 있지 않다고 하면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워진다.

하지만 반대로 '전통적인' 창조론은 화석을 통해서 보여지는 대진화에 대한 증거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분명히 대진화라 여겨지는 중간화석은 존재하고 있고, 또 그 수많은 중간화석들이 왜 존재하는가에 대한 설명도 부족하다.

내 잠정적인 결론은 모른다이다. 어느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가 없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만으로 전체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일이기에... 그것이 신이 있는지에 대해 모른다는 결정은 아니다. 진화론이 옳은가 틀린가의 문제는 더 생각하고, 더 공부하고 판단을 내릴 일이다. 아니 어쩌면 평생 마땅한 대답을 못찾을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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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에 대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것이 진화론이다. 아니 사실 논쟁을 거는 쪽은 기독교인 쪽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검색엔진에서 "진화론" "증거" 이 두단어를 치고 검색을 하면, 진화론을 증명하는 증거보다, 진화론의 증거를 부정하는 기독교인들의 글이 더 많이 올라와 있다.

근데 진화론을 부정한다는 기독교인들의 글을 보면 너무 천편일률적이다. 어느 글에서나 등장하는 똑같은 논점, 똑같은 주장들. 창조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에서 그치고 있다. 진화론이 틀렸다고 해서 창조론이 곧 옳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창조론을 옹호하여 과학으로 증명한다고 하는 창조과학회에 가보더라도 상황이 더 좋은 것은 아니다. 반쯤은 진화론의 문제점 지적. 나머지 반은 창조론 옹호이지만 많은 글들이 과학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한 글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것은 창조과학이라고 이름을 거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논리가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빅뱅이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열심히 나열하고, 어떤 이는 빅뱅이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글을 쓰고 있다.

그에 비해 진화론에 관한 학술적인 자료들을 찾아보면 굉장히 체계가 잡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자료들과 증거화석들이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창조론 비판에 대한 글만 읽어본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이 허접한 이론이고 증명되지도 않은 가설을 어거지로 우기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화론을 공부해보면 꽤나 체계적이고 뒷받침되는 증거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각 가설에 대해 어떤 증거가 나오면 그 가설이 잘못되었다는 것까지도 연구가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조론과는 명백히 위배되어 보이는 진화론. 그리고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무시할 수 없는 양의 증거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증거들을 신이 없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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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할려면 먼저 기적의 정의부터 내려야 할 것 같다. 국어사전에 기적의 뜻은 '사람의 생각이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기이한 일'으로 정의 되어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말한다. 또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기적이라고도 표현한다.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 대해 사람들이 비판하는 것은 소위 기적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성경은 온갖 기적으로 가득차 있다. 노아의 홍수, 애굽의 열가지 재앙, 갈멜산에서의 불내림,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고 예수의 부활까지. 그뿐인가. 요즘도 교회 내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암이 낳았다는등의 육체적인 현상도 있고, 기도를 했더니 고아들을 먹일 빵이 배달이 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기적까지 다양하다.

그런데 이 기적이라는 것이 이성적으로 참 납득하기 어렵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은 다 전설이나 동화 같고, 요즘 벌어진다는 기적들은 사기극이거나, 심리적인 착각, 혹은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게 더 이해하기도 쉽고 받아들이기도 쉽기 때문이다. 양보해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건 아직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 그게 기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보여주면 모두가 기적이라 벌벌 떨겠지만, 지금 세상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지금 벌어지는 현상들도 언제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무신론적인 주장이다. 결국 기적이란 없다는 것이다.

근데 이걸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기적이 없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사는 오랜 기간 동안, 이성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중에 우연이라고 굳이 설명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을 빼고도 설명을 할 수 없는 물리적인 일이 두가지가 있다. 내 옆에서 벌어지지 않았거나, 내가 직접 체험하지 않은 일들은 제외했다.

이십여년전 큰조카 (큰 누나의 아들)과 둘째 조카 (둘째 누나의 딸)이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두 아이다 엄마 배속에서 같은 문제를 가지고 나왔는데, 그건 고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였다. 한쪽에 응어리가 져서 그걸 치료하기 위해서는 일년 가까운 물리치료를 해야했었다. 아니면 평생 그 흔적을 가지고 있게 된다고 한다. 당시 전도사였던 큰 매형 식구는 일년 가까운 물리치료를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였다. 그래서 기도를 했고 하루만에 큰 조카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응어리가 없어진 것이다. 마찬가지로 물리치료를 감당하기 어려웠던 둘째누나의 딸은 치료를 못받았기에 그 흔적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흔히들 기도를 받고 병이 고쳐지는 것은 기도 받은 사람의 자기 암시를 통한 착각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정신력이 치료를 도왔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큰 조카의 경우는 그때 오개월이 안되었다. 자기 암시를 할 수도 없거니와 정신력이 발휘될 수도 없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던 질병도 절대적으로 장기적인 물리치료를 해야지만 되는 경우였다. 오히려 암이 낳는 것보다도 더 타당한 설명을 찾기 어려운 것이다.

또 하나는 소위 말하는 성령체험이다. 방언 같은 것이다. 방언을 하거나 진동을 경험하는 것을 보고 집단적인 히스테리 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뭐...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 하지만 방언도 익숙해지면 집단 히스테리 속에 있어야만 방언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한다면 어디서든지, 전철 안에서도, 회사에서 근무하다가도, 즉 아주 멀쩡한 상태에서도 방언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대화도 나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방언에 대해서는 정신적인 착각이라 말할 수 있어도 내가 그걸 경험하고 있을 때는 정말 "누군가"가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만큼 방언은 내가 아주 정상적인 상태, 전혀 흥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내게서 내 입에 대한 콘트롤을 뺐어간다. 그 현상은 지속적이며 일관적이다. 그리고 하면 할수록 더 발전되고 (어휘가 늘어나고) 내가 콘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더 늘어난다.  이런 현상을 이성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직접 보고 경험한 내 입장에서는 "기적은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것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눈 앞에 벌어지는 현상이 있고, 그 현상을 '아직까지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두가지의 타당한 설명이 있을 수 있다. 한가지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기적은 없지만 아직은 왜 그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을 통해 분명히 원인을 찾아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입장이고, 또 한가지는 기적의 원인이 되는 초월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사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온 세상을 창조한 -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성경에 나타나는 기적들을 인정하기란 어렵지가 않게 된다. 천지 창조와 같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었다면, 예를 들어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유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은 너무나 쉽기 때문이다. 결국 질문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창조자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돌아가게 된다.

선택의 문제로 돌아가는듯 하지만, 그래도 차근 차근 창조자의 존재 여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하겠다. 유신론 특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창조자의 존재 증거는 다음의 다섯가지로 요약이 될 수 있다. 사실 증거라기보다 상황에 따른 추론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1. 신을 통해 세상의 근원을 설명할 수 있다

우주의 근원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빅뱅이론이다. 빅뱅이론은 우주 전체가 아주 오래전 생긴 대폭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이론이다. 공간과 시간은 대폭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대폭발 이후에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이론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들이 있기에 이 이론은 현재 우주의 근원에 대해 가장 타당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이 이론에 대해 사람들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이 빅뱅의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의 의견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우주 자체가 근원이고 영원하다는 생각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자'이며 영원하다고 믿는다. 우주 자체가 근원이거나 아니면 그 우주를 만들어낸 근원이 되는 신이 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우주에는 출발점(빅뱅)이 있기에 빅뱅을 일으킨 원인이 있어야한다는 것이 유신론자들의 주장이고, 그 원인은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2. 잘 꾸며진 우주와 인간은 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세상과 인간을 바라보면 참 잘 짜여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정교한 것을 보면 누군가 디자인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의 결과다라는 것이 더 믿겨지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사실 지금의 세상이 우연의 결과다라는 주장은 무신론자나 진화론자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였다. 그 때문에 최근 몇십년간 현재 결과의 개연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시 되었다. 하지만 어느 이론도 반대되는 증거가 있는 상태다. 혹은 스티븐 호킹처럼 무한 우주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무한대 수의 우주가 있는 것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우연히도 인간이 살 수 있는 환경이 되었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이 가설은 어쩌면 '신이 있다'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도 더 증명하기 힘들어 보인다. ^^

#3. 객관적 도덕 기준의 존재 여부는 신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 주장은 두가지의 작은 논쟁거리를 담고 있다. 첫째는 객관적 도덕 기준이라는 것이 있느냐 하는 것과, 객관적 도덕기준이라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객관적 도덕 기준이라는 것은 없다라고 말을 한다. 세상의 많은 도덕 기준들이 사회적인 발전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람들 사이의 동의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구하고 어떤 것들은 명백히 '나쁜 것이다'라고 말할 만한 것이 있다. 나는 이 문제는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이들에게 양심이라는 것이 주어져 있는데, 그 마음을 잠잠히 들여다 보며 '살인이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애들을 학대하는게 뭐가 나쁘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찌에 대한 유태인 학살이 단지 역사가 그렇게 흘러갔기 때문이지 '객관적으로'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세상에 객관적인 도덕 기준이 있다고 '이성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객관적 도덕 기준이 있다는 것이 신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거냐?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이 그런 객관적 도덕기준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설명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사람들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이, 객관적 도덕기준이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데로' 행동한다면... 그게 지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신문 사회면에 보이는 도저히 이성이 있다면 할 수 없는 추악한 일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대로 발전한다면 이게 지옥이 아닐까?

#4. 신의 존재는 부활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설명이다

부활이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또 다른 논쟁거리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 당시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설명하기가 굉장히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부활이 있었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에 대해서는 따로 한번 정리를 해 볼 생각이다. 그렇다면 부활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보통 사람의 경우에는 부활은 없다. 몸속의 장기들이 활동을 하지 않아 잠깐 가사 상태에 빠지는 경우는 있다. 하지만 예수처럼 외부의 요인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후에 36시간이 넘어서 다시 살아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누가 살려주지 않는 이상, 누군가 살려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가 있지 않은 이상 부활을 설명할 방법은 없다.

#5. 신은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아마도 이 주장은 가장 주관적이면서도, 어쩌면 가장 객관적인 것일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나에게 너의 부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여러가지 증거를 댈 수 있다. 운전면허증, 주민등록등본, 같이 찍은 사진 등등. 하지만 나 개인에게 있어서는 그런 증명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왜냐면 나는 나의 부인을 보고, 만지고,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 신을 경험하는가? 최근 한달여 동안 지난 20여년을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돌아보았다. 그 삶 속에서 신, 즉 하나님을 경험했던 순간들이 꽤 많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있구나. 내가 하나님을 통해 변화되고 있구나. 그런 경험들이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물리적인 경험도 있지만, 사실 나에게 더 놀라운 것은 내 생각과 태도의 변화다. 누군가 물어볼 수 있다. 그게 나의 착각이 아니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냐? 그게 객관적이라고 증명할 수 있냐? 노력이야 하겠지만 내 경험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은 안 한다. 그 경험들은 철저히 주관적이니까. 대신 앞에서 제시한 몇가지의 주장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여전히 일정 정도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여러가지 객관적으로 신이 없다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과 주관적인 경험들을 토대로 '신 이외에는 타당한 설명이 없다'라고 이성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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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도올이 인기다. 어느 신문이든 도올의 주장과 함께, 그게 새로운 지식인의 주장인양 한마디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은 위기의식을 느끼는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정도 기독교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참 웃기다 못해 한심하고, 또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 오늘 읽은 기사의 전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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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은 4일 펴낸 <기독교성서의 이해>에서 이미 논쟁을 불러온 ‘구약 폐기론’뿐 아니라 현 기독교에서 너무나 당연스럽게 여기는 유일신앙과 삼위일체설을 정면으로 반박해 또다른 쟁점을 만들었다.

그의 글은 예수 생애 전후 시대와 성서가 형성된 당시의 종교, 문화, 인물들에 대한 고증을 깔고 있다. 기독교를 공인해 13번째 사도로까지 불리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장인과 부인, 친자식까지 처참하게 고문해 죽인 ‘역사적 사실’도 글에 언급했다.

이 책은 ‘성서 문자 무오류설’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도올은 “초기 기독교엔 구전과 예배제식만 있었지 경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며 “1세기에만 해도 예수한테서 직접 말씀을 듣거나, 직접 들은 제자한테서 직접 전해들은 ‘사도’의 말이 경전과 같은 권위를 지녔는데, 2세기 초에 이런 사람들이 모두 죽고, 교회 내의 구술 전통이 변형되고 왜곡되면서 곳곳에서 사도성을 가장해 경전을 저작하거나 편집하는 것이 자유롭게 이뤄졌다”고 쓰고 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민족의 유일신앙은 야훼교를 창시한 모세로부터 출발한 것이며, 초기 기독교에선 예수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도 자연스러웠다고 주장했다. 그는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알렉산더와 ‘예수는 인간일 뿐’이라며 논쟁했던 아리우스는 오늘날엔 흉악한 이단자로 취급되고 있다”며 “그러나 당시 아리우스의 주장은 초기 기독교도들의 리버럴한 사상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대변한 것이었고, 그렇지 않았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중재에 나설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도올은 “‘성부·성자·성신’이라는 말도 복음서의 개념이 아니며 오직 가톨릭교회 내에서 성립한 삼위일체 논쟁 이후의 독단적인 교리 개념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자유주의 신학 전통이 활발한 서구에서는 자유로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복음주의적이고 보수적인 전통 탓에 논의 제약이 심했다. 도올의 주장이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배경이다.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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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도올이 삼위일체를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진리라고 인정한 이유를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그리고 그와 다른 주장을 하는 자들을 이단자로 취급한 이유를 알고 있을까?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나오게 된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들을 제대로 찾아보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최초의 성경 사본의 추정연대가 50~60년이라는 사실을 알기나 하고 말하는 걸까? 세상에 가장 많은 사본과 참고자료가 있는 것이 성경이고 그들의 일치되는 비율이 95%가 넘는다는 것을 알고서도 자유로운 저작과 편집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성서 문자 무오류설’의 위험성을 지적했다고? 도올은 지금 기독교에서 성서의 문자 하나 하나를 아무런 의식없이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보수적인 교회에서도 완전 무오류설을 믿는 교회는 없다. 필사 과정에서 실수가 생길 수 있는 것을 다 인정하고 있다.

도올이 하는 주장의 수준을 보면 그가 '다빈치 코드' 하나 읽고 말하고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도올이 하는 말들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다.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수없이 거론되어지고 수없이 교정을 거친 말들이다. 그런데 마치 자기가 새로이 깨달은 것인양 이야기하고, 또 그것이 새로운 지적인양 보도하는 신문들... 하나같이 한심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보수적인 전통 탓에 논의 제약이 심했다고? 도올의 주장이 파격적이라고? 20년도 전에 아직도 고등학생이였던 나도 여러번 토론하고 고민했던 주제다. 도데체 뭐가 새롭고 뭐가 파격적이라는 건가?

한국 기독교가 교회 짓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은 초등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이야기 말고 도올에게서 제대로 된 학문적인 그리고 신학적인 지적을 보고 싶다. 어디서 줏어들은 소문을 말하는게 아니라 기독교 교리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문제가 있는지 하는 제대로 된 비평을 듣고 싶다.

자기도취에 빠져 몇마디 한 것에 남비 들끓듯 하는 걸 보니, 기독교의 꼴이 참 우습게 되긴 되었나 보다. 얼마나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기 이런 주장이 화제가 될까?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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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앙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와이프가 교회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나 보다. 그랬더니 비슷한 고민을 가졌던 한 분이 이렇게 조언을 했더란다. "아무리 고민하고 또 이론적인 책을 읽어도 해결이 되지를 않는다. 성경을 읽고 더 하나님의 말씀에 파고 들어야 그런 고민이 없어진다."라고.

동감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민을 없애기 위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심하게 이야기한다면 더 강하게 자기 세뇌를 시키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의심이 생기면 "기도를 안해서 그래. 더 기도하고 열심히 믿어봐"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다.

유치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공산주의에 의심이 가는 사람이 공산주의 서적을 열심히 파며 읽으면 어떻게 될까? 결국 자기 세뇌를 더 하는 결과 밖에 더 될까?

난 그래서 일부러 성경을 읽지 않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내 마음에 있는 의심과 질문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기 전에는. 그리고 무신론자 반기독인들이 제시하는 기독교의 문제점과 모순들에 대해 충분히 조사해 보기 전에는 성경을 읽지 않을려고 한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 상황에서 성경을 읽고 편안함을 얻는다면 언제가는 다시 나는 의심을 할 것 같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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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세상에 왜 고통이 있을까?"

첫번째 질문이면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도록 만드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일단 "믿음사건: The Case for Faith"의 해당 내용을 읽었다. 질문에 대해 충분히 동감하면서,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히 되새기면서 읽었다.

그 대답은 어떻게 보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하나님은 선하다, 고로 악을 미워한다. 하나님은 전능하다, 고로 악을 없앨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하다, 고로 어느것이 좋은 것인지 안다. 이 세가지를 생각한다면 논리적 결론은 "이 세상에 악이 있을 수는 없다"이다. 하지만 악은 있다!! 세상에 고통은 있다!!

아직 나는 "무조건 믿고 맡겨라"는 용납 못하겠다. 우리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므로 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도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일관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일관적인 설명이 있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통의 문제, 악의 문제를 말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자유의지이다. 인간을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차라리 나을 로봇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고민 안하게. 그냥 딱 정해진 방향으로만 살아가게.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에게 좋을 것이 될 수 있기에 고통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해못할 말은 아니다. 맨날 나를 보면 생긋 웃고 있는 강아지 인형보다는, 가끔은 짖기도 하는 진짜 강아지의 사랑이 더 가치있을 것이다. 밥만 주면 좋아라 하며 꼬리치는 강아지보다는, 맛나게 차려줘도 불평하는 딸아이의 사랑이 더 고귀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놔두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하기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사실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늘의 나쁜 것이 내일의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건 이성의 문제는 아니다. 이건 체험의 문제이다. 이런 전제하에 예수의 사건은 최대한의 고통이 결국에는 좋은 것을 이룬 증거이다. 고통당하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 당시는 완전한 패배였지만, 그 패배가 있었기에 결국 그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고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고통 당하는 이들은 더 신을 찾게 되고, 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아무일 없이 편안할 때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더 신앙이 좋아진 것 같다. 우리 집만 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한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그거야 힘드니까 의지하는 것을 찾을려고 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이 있다면 인간의 고통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의 예는 참 많이 보인다. 고통의 상황에서 인간은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신을 부정하고, 어떤 이는 신을 발견한다. 자유의지가 있기에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통의 상황에서 인간은 신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많은 고통을 받았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를 왕으로 삼겠다고 떠받들던 백성들은 그를 못박으라 외쳤다. 매맏고, 찢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히며, 하나님과의 단절까지 경험했다. 유태인 수용소에 같혔던 코리텐붐의 말대로 "우리 상황이 아무리 어둡다 한들, 그는 더 어두운 곳에 있다". 그가 고통을 당했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고통 가운데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예수이다.

믿겨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일관적인 납득할만한 설명은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전체에 대한 명백한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신이 자기 멋대로 인간을 괴롭히는 엉터리 독재자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5년전 한 부부가 있었다. 교회는 다녔지만, 그렇게 열심은 아니였던 남편은 부동산을 일찌기 시작해 열채도 넘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부인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골 외진 곳에 갔다가 맹장이 터졌다. 그런데 시골 의사가 오진을 해서 약을 잘못주어 결국 맹장이 썩게 되었는데도 이를 며칠간 내버려 두었다.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내장은 망가질데로 망가진 상태였고, 수송 도중 실제로 숨이 잠깐 멈추었다 다시 회복되기까지 했다.

육개월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그동안 벌어놓았던 재산을 다 날렸음에도 남편은 부인이 살아났음에 감사하며 정말로 열심인 신앙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2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니며, 정말 성실하게 직장생활과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농원을 선교사업에 쓰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드렸다. 자신은 너무나도 검소한 생활을 하시면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이야기다. 고통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고통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고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는 사실 내 바로 옆에 있다. 장인 장모의 인자함과 열심, 성숙함에는 언제나 고개가 숙여진다. 그 분들 보면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자다.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 그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은 오히려 신에 가까와진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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