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신앙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와이프가 교회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나 보다. 그랬더니 비슷한 고민을 가졌던 한 분이 이렇게 조언을 했더란다. "아무리 고민하고 또 이론적인 책을 읽어도 해결이 되지를 않는다. 성경을 읽고 더 하나님의 말씀에 파고 들어야 그런 고민이 없어진다."라고.

동감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민을 없애기 위한" 방법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건 심하게 이야기한다면 더 강하게 자기 세뇌를 시키는 것이기도 하지 않나? 난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의심이 생기면 "기도를 안해서 그래. 더 기도하고 열심히 믿어봐"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다.

유치한 비유일지는 모르지만 공산주의에 의심이 가는 사람이 공산주의 서적을 열심히 파며 읽으면 어떻게 될까? 결국 자기 세뇌를 더 하는 결과 밖에 더 될까?

난 그래서 일부러 성경을 읽지 않기로 결정했다. 적어도 내 마음에 있는 의심과 질문들에 대해 충분히 생각해 보기 전에는. 그리고 무신론자 반기독인들이 제시하는 기독교의 문제점과 모순들에 대해 충분히 조사해 보기 전에는 성경을 읽지 않을려고 한다. 남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 상황에서 성경을 읽고 편안함을 얻는다면 언제가는 다시 나는 의심을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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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세상에 왜 고통이 있을까?"

첫번째 질문이면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도록 만드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일단 "믿음사건: The Case for Faith"의 해당 내용을 읽었다. 질문에 대해 충분히 동감하면서,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히 되새기면서 읽었다.

그 대답은 어떻게 보면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인 것 같다. 하나님은 선하다, 고로 악을 미워한다. 하나님은 전능하다, 고로 악을 없앨 수 있다. 하나님은 전지하다, 고로 어느것이 좋은 것인지 안다. 이 세가지를 생각한다면 논리적 결론은 "이 세상에 악이 있을 수는 없다"이다. 하지만 악은 있다!! 세상에 고통은 있다!!

아직 나는 "무조건 믿고 맡겨라"는 용납 못하겠다. 우리의 이성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므로 다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에도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일관적인 메시지가 있다면, 일관적인 설명이 있다면 그건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통의 문제, 악의 문제를 말할 때 항상 등장하는 것이 자유의지이다. 인간을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도 차라리 나을 로봇으로 만들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고민 안하게. 그냥 딱 정해진 방향으로만 살아가게. 불행하게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선택할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우리에게 좋을 것이 될 수 있기에 고통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이해못할 말은 아니다. 맨날 나를 보면 생긋 웃고 있는 강아지 인형보다는, 가끔은 짖기도 하는 진짜 강아지의 사랑이 더 가치있을 것이다. 밥만 주면 좋아라 하며 꼬리치는 강아지보다는, 맛나게 차려줘도 불평하는 딸아이의 사랑이 더 고귀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놔두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선택하기를 기대하고 기다린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통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 사실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인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늘의 나쁜 것이 내일의 좋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개입한다는 것이다. 이건 이성의 문제는 아니다. 이건 체험의 문제이다. 이런 전제하에 예수의 사건은 최대한의 고통이 결국에는 좋은 것을 이룬 증거이다. 고통당하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 당시는 완전한 패배였지만, 그 패배가 있었기에 결국 그의 목적을 이룬 것이다.

흥미로운 주장이 있다. 고통당하는 이들을 보고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의 외부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고통 당하는 이들은 더 신을 찾게 되고, 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아무일 없이 편안할 때보다, 힘들고 어려울 때 더 신앙이 좋아진 것 같다. 우리 집만 해도 아버지 사업이 망한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니까.

"그거야 힘드니까 의지하는 것을 찾을려고 하는 거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신이 있다면 인간의 고통을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의 예는 참 많이 보인다. 고통의 상황에서 인간은 정반대의 선택을 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신을 부정하고, 어떤 이는 신을 발견한다. 자유의지가 있기에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통의 상황에서 인간은 신에 대해 더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많은 고통을 받았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그를 왕으로 삼겠다고 떠받들던 백성들은 그를 못박으라 외쳤다. 매맏고, 찢겨지고, 십자가에 못박히며, 하나님과의 단절까지 경험했다. 유태인 수용소에 같혔던 코리텐붐의 말대로 "우리 상황이 아무리 어둡다 한들, 그는 더 어두운 곳에 있다". 그가 고통을 당했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고통 가운데 그대로 내어버려 두신 것은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예수이다.

믿겨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일관적인 납득할만한 설명은 발견했다고 생각한다. 전체에 대한 명백한 답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신이 자기 멋대로 인간을 괴롭히는 엉터리 독재자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25년전 한 부부가 있었다. 교회는 다녔지만, 그렇게 열심은 아니였던 남편은 부동산을 일찌기 시작해 열채도 넘는 집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부인이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골 외진 곳에 갔다가 맹장이 터졌다. 그런데 시골 의사가 오진을 해서 약을 잘못주어 결국 맹장이 썩게 되었는데도 이를 며칠간 내버려 두었다. 큰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내장은 망가질데로 망가진 상태였고, 수송 도중 실제로 숨이 잠깐 멈추었다 다시 회복되기까지 했다.

육개월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그동안 벌어놓았던 재산을 다 날렸음에도 남편은 부인이 살아났음에 감사하며 정말로 열심인 신앙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25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다니며, 정말 성실하게 직장생활과 신앙생활을 했다. 그리고 전재산이라 할 수 있는 농원을 선교사업에 쓰게 해달라고 하나님에게 드렸다. 자신은 너무나도 검소한 생활을 하시면서.

장인어른과 장모님의 이야기다. 고통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 고통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고 더 성숙해질 수 있다는 것의 증거는 사실 내 바로 옆에 있다. 장인 장모의 인자함과 열심, 성숙함에는 언제나 고개가 숙여진다. 그 분들 보면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보면서 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고통에 동참하지 않는 자다.
그 고통을 당하는 사람, 그 고통에 동참하는 사람은 오히려 신에 가까와진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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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언급했듯이 찰스템플턴이 자신의 신앙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먹을 것이 없어 죽은 아이를 안고 고통하는 한 여인의 사진을 보았을 때였다. 실제 아직도 아프리카에서는 하루에 만이천명의 아이들이 먹을 것이 없거나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간다고 한다.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아 온 얼굴에 붙어 있는 파리떼를 쫓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얼마나 마음 아픈 모습인지.

그 뿐인가. 세상 곳곳에서 전쟁과 가난으로 목숨을 잃거나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환경이 좋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술취한 운전사에 의해 한순간에 아버지를 잃어버린 가정. 유괴범에 의해 소중한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신앙생활 열심히 하던 착한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어버린 윤상병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의 신앙이 부족해서 생긴 일일까?

이성적으로 따졌을 때, 세상의 고통과 사랑의 하나님을 연결시키기는 참 어렵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면서 인간의 고통을 그대로 놔둔다면 선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한다 하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을 부모는 없기 때문이다. 가끔 아이들이 힘들어도 가르치기 위해서 그냥 놔두는 부모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힘든 것과 죽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다른 각도로 선하기에 인간을 위해 좋은 일을 해주기 원하더라도, 해줄 수 없다면 전능한 하나님이 아니다. 마치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어 악한 신이 인간을 괴롭혀도, 선한 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는, 힘이 딸리는 그런 식의 신화가 되어버린다.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할 수 있는가?

세상의 적지 않은 재앙이 사람으로 인해 생긴 것들이다. 하지만 큰 재앙을 가지고 오는 지진이나 가뭄, 폭풍, 전염병등은 사람의 잘못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사람은 그런 것들을 콘트롤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 누군가? 그건 신이 아닌가?
 
첫번째 질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구나 한번은 느껴봤을 질문. 아픔을 겪었거나, 주위의 고통을 보았던 사람이라면 "도데체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질문 한 번은 다 해보지 않았을까?  

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어떻게 세상에 고통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을 것 같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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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3분간

2007. 3. 2. 18:05

아직 충분한 이성이 발달되지 않았을 중고등학교 시절 시절, 나는 물리학과 천문학에 빠져 있었다. 그때의 소망은 물리학도가 되어 평생 우주의 원리와 씨름하는 것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나처럼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물리학이나 천문학을 선택했었다면 얼마나 힘들어 했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산업공학과를 나와 소프트웨어 업종에 근무하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아직 아쉬움은 남아있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파고들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말이다.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던 나는 과학과 신앙이 마치 물과 기름과 같다는 당시 교회 어른들의 반응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과학과 신앙에 대한 내 태도는 25년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했다 ^^;;; 이성을 최대한 사용해서 우주의 원리를 밝혀내야한다. 만약 그게 신의 영역을 침범하는 거라면, 그렇게 침범당할 신이라면 이미 신이 아니다라고.

당시 내가 열심히 탐독하던 책중에 "처음 3분간"이라는 책이 있었다. 빅뱅 이론을 설명하면서, 빅뱅이 일어나고 난 처음 3분간 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자세하게, 마치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듯이 쓴 책이였다. 재밌는 것은 책 저자가 생각이 나질 않아 인터넷을 뒤져보니 어릴 때 이 책을 읽고 과학도의 꿈을 키운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였다는 거다. ^^;;;

참고로 "처음 3분간"은 스티븐 와이버그가 쓴 책으로 최근에 "최초의 3분"이라는 제목으로 새로 출판되었다. 나는 그 책을 일본 물리학자가 썼었다고 최근까지 믿고 있었는데 잘 못 알고 있었던 거다.

이 책에서 흥미로왔던 것은 빅뱅 이전의 상태와 빅뱅을 일으키게 만든 촉매에 대한 저자의 이론적인 고찰(거의 추측에 가까운)이였다.

알다시피 우주의 탄생은 빅뱅과 더불어 시작한 것이라는 것이 빅뱅 이론이다. 그 이전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추측하는 것은 에너지를 담고있는 공간아닌 공간이라는 것이다. 공간은 공간이되 무언가 힘을 내포하고 있는 공간. 뭔가 불안정하면서도 그 상태로 몇백만년도 갈 수 있는 그런 공간. 안정되어 있되 동시에 불안정한. 그런 상태가 아니였겠는가라고 저자는 추측하고 있었다. 물론 과학적인 증거는 없다. 빅뱅 이전의 상태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무엇이 빅뱅을 일으켰을까라는 것에 대한 추측이다. 역시 이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하지만 빅뱅이론에서는 어떤 입자. 터널현상을 통해 무에서 유로 변환되는 최초의 입자. 그 책의 저자는 그 형태로 유력한 것이 빛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즉 공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에너지 속에서 자그마한 빛이 그 불안정한 안정상태를 깨면서 빅뱅을 유발했다는 가정을 그 책에서는 담고 있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으면서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창세기의 처음 부분과 굉장히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창세기 1:2에 창조 이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라고 표현하고 있다. 저자가 짐작하고 있는 빅뱅 이전의 상태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성경은 창조의 시작을 "빛이 있으라"에서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최초의 빛, 그것은 태양에서 오는 빛이 아니다. 왜냐면 해와 달은 나중에 창조되었다고 말하니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빛"은 그 근원이 어디인가라는 생각과 더불어, 빅뱅을 일으키는 촉매역할을 했을 거라 추정되는 빛이 어울러져, 빅뱅이 성경의 창조론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은 교회에서 별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냐면 성경이 세상이 6일만에 창조되었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최근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몇몇 만났다. 듣기로는 빅뱅이론을 싫어하는 무신론자들이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과정이 창조론과 흡사하기 때문이란다. 아이러니한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빅뱅이론을 싫어한다. 왜냐하면 성경의 문자적인 표현과는 안맞으니까.

최근에는 빅뱅이론에 대한 문제점 지적도 많다. 무신론진영과 기독교진영 양쪽에서... 다른 동기를 가지고. 하지만 과학적인 사실 추구가 계속된다면 빅뱅이 사실인지 아닐지 증명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게 인간의 영역이라면 말이다.

우주의 근원을 생각하며 과연 신은 있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빅뱅 이전에 이 세상을 디자인하고 빅뱅을 만들어낸 하나님.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최적화된 환경. 그 환경중 한두가지만 어긋나도 인간은 생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 디자인했을테고, 신을 부정한다면 마땅한 답은 없지 않은가?

반대로 모든 것이 우연의 산물일까? 혼돈에서 현재의 세상으로 무수한 우연과 선택을 거쳐서. 창조과학자들은 그것이 물리학의 제2법칙과 위배된다고 하면서 말도 안된다 하지만... 그게 절대적인 답일까? 누구 말대로 이런 논의 자체가 필요없고 의미 없는 것일까? 어차피 어느 한쪽도 뚜렷이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성으로 충분히 납득되는 신앙. 이성에서 출발하는 신앙을 꿈꿨었다.
근데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선택의 문제요, 받아들임의 문제라고...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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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기원에 대해 자료를 찾아보며 오래전 공부했던 내용들을 기억해내고 있다가, 그러면 기독교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할까 궁금해 창조과학회를 들어가 보았다. 올라와 있는 글들을 보며 받은 느낌은 대부분의 글들이 창조론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하고 있고, 또 진화론의 흠집내기에 굉장히 열심이라는 것이다. 눈 앞에 보이는 과학의 증거들과 성경에서 말한다고 여겨지는 것과의 명백한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를 무시하며 비기독교계에서 제시하는 증거들을 믿을 수가 없다라는 식의 주장은 또 다른 강요라 생각해서 실망감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 중 내가 생각한 과학과 신앙의 조화에 굉장히 가까운 의견을 보았기에 여기에 싫어본다. 김창완이라는 분의 글인데 그분의 배경은 전혀 모르겠지만, 많은 부분에서 공감이 된다.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195&orderby_1=editdate%20desc

1. 진화의 의미

...영적인 측면에서도 유신론적 진화론은 빛과 어두움, 신앙과 불신앙, 계시와 철학을 혼합시키려는 시도로 비난받는다. 즉 유신론적 진화론이란 말 자체 이미 '무기체의 신진대사', '기독교적 무신론' 따위의 말처럼 자기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오버톤 판사는 '창조주에 대한 믿음과 과학적 진화이론의 수용은 상호 배타적'이라는 창조주의자의 주장에 대하여서도 격분하면서, 이런한 의견은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견해에 대하여 공격적인 것'이라며 이를 반대했다.

'진화'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서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토론 당사자가 서로 상대방이 말하는 '진화'의 의미와 자신의 것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 실제로 이러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 토론은 공허하고 소모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 이전에 몇몇 '진화'의 정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정의 1>> 진화란 유전자 풀(Gene Pool)에서의 시간에 따른 유전자 빈도수의 변화를 의미한다.

위와 같은 정의가 진화론자들 사이에서 널리 사용되는 모양이다. 이러한 정의라면 확실히 '진화는 사실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며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 창조과학자들을 포함해서 -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진화는 사실이다'라는 진술은, 예를 들어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것을 보증하지 않는다. 정의 1은 진화가 확실한 사실임을 보증하지만 기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바가 전혀 없다.

진화의 다른 정의들을 살펴보기 전에 진화론에 대하여 진화론자들 자신이 한 흥미로운 분석을 잠시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Ernst Mayr에 따르면 다윈론은 다섯 가지 소이론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다섯 가지 이론들이 세분할 수 없는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고 한다. 그 다섯 가지 이론은 다음과 같다.

1) 진화 그 자체 : 이 이론은 세계가 항상 일정하거나, 최근에 만들어졌거나, 영원히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변화되고 있으며, 생물들도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이론이다.

2) 공동 후손 : 이 이론은 모든 생물 무리들이 공동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동물, 식물, 미생물 등 모든 생물들이 궁극적으로는 지구상에 단 한 번 나타났던 생명체에서부터 유래했다는 이론이다.

3) 종의 증가 : 이 이론은 엄청나게 많은 생물 다양성의 기원에 관한 이론이다. 즉,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게 될, 지리적으로 격리된 발견자 집단에 의해 한 종에서 두 자손 종이 만들어지거자,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이 만들어지게 되어 종의 수가 증가한다고 설명한다.

4) 단계주의 : 이 이론에 따르면, 진화적 변화는 개체군의 단계적 변화에 의해서 일어나지, 새로운 형을 대표하는 새로운 개체가 급작스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5) 자연선택 : 이 이론에 따르면, 진화적 변화는 각 세대마다 유전적 변이가 많이 만들어지고, 다음 세대로 전해진 유전 형질 가운데 특별히 잘 적응한 유전 형질의 조합을 지닌 상대적으로 작은 수의 개체들만이 살아남게 되어 다음 세대를 이루게 된다.

<<정의 2>> 진화란 일정하지 않고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의 2는 가장 넓은 의미로서 '우주의 진화'나 'The evolution of scientific creationism'이라고 할 때 사용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Mayr의 목록 중 1)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때의 '진화'는 정적인 세계관에 반대하는 모든 입장에서 사용할 수 있겠다. 사실 성경도 정적인 세계관에 배치되므로 이러한 '진화'는 성경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 1장은 - 정의 2의 의미로는 - 명백히 진화론적이다.

<<정의 3>> 진화란 모든 생물이 공동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한 종에서 두 종이 만들어지거나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이 만들어짐으로써 종의 수가 증가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지구상에 단 한 번 나타났던 생명체로부터 유래하였음을 의미한다.

정의 3은 Mayr의 목록에서 1), 2), 3)을 합한 것에 해당한다. 이러한 '진화'는 유신론적 세계관과 어떤 명백한 충돌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창세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이 어려운 문제로 남기는 하지만 정의 3을 사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은 Intelligent Design Theory의 허용범위 안에 든다.

<<정의 4>> 진화란 모든 생물이 공동 조상에서 기원했으며, 자연 선택을 통하여 한 종에서 두 종이 만들어지거나 한 종에서 다른 한 종이 만들어짐으로써 종의 수가 증가하는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지구상에 단 한 번 나타났던 생명체로부터 유래하였음을 의미한다.

Mayr의 목록에서 4)는 5)로부터 나온다고 생각된다. 정의 4는 정의 3에 5)을 합한 것이다. 자연 선택은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Phillip Johnson에 따르면 자연 선택은 자연주의로부터 필연적으로 얻어지는 결론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연 선택이 신학적으로 허용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이 문제는 - 자연 선택의 문제는 - 유신론적 진화론 논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정의 5>> 진화란 모든 생물이 하나님 없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이렇게 명시적으로 정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러한 의미가 완곡하게 표현되기도 하며, 많은 사람들이 '진화'라고 말할 때 그 마음 속으로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인 경우가 많다. 정의 5는 명백히 과학의 범위를 넘어서는 철학적 진술이며 기독교인이라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유신론적 진화론자도 정의 5를 사용하지 않는데 그럴 경우 그것은 실로 '기독교적 무신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II. 창조과학 비판

창조과학은 인간의 기원, 지구의 연대, 그리고 지질학적, 생물학적 변화의 메커니즘에 대해 분명하게 사고하는 일을 어렵게 만듦으로서 복음주의에 손상을 주었다. 그러나 창조 과학이 초래한 더욱 심각한 악영향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과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잠식한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한결같이 창조과학을 비판한다. 예를 들어 Heckenlively는 그의 글 'Scientists Who Keep the Faith'에서 창세기 문자주의(Genesis Literalism)의 4가지 형태를 다음과 같이 썼다.

(1) 구획화 (Compartmentalization) : 과학이 말하는 바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 사이의 모순을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경우.

(2) 과학에 대한 불신 (Distrust of Science) : 그 자신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학적) 증거를 믿기를 거부하는 경우.

(3) 증거의 선택적 사용 (Selective Use of Evidence) : 선입견에 부합하는 증거는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증거는 무시하는 경우. (그는 이러한 일이 진화론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음도 언급하였다.)

(4) 과학에 대한 무지 (Ignorance of Science) : 과학적 결과가 창세기의 문자적 해석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지 모르는 경우.

이 중 특히 (3)이 창조과학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같은 글에서 창조과학자들이 선택적으로 무시했다고 보는 증거들- 대진화의 증거들 -을 나열하고 있다.

(1) 소진화 (Microevolution) : 종분화(speciation)에 대한 확실한 증거들이 있으며, 이것을 널리 받아들여지는 '균일설(uniformitarianism)'과 함께 생각하면 대진화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2) 화석 (Fossils) : 우리는 많은 화석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는 어류와 양서류, 양서류와 파충류, 파충류와 조류, 그리고 파충류와 포유류 사이의 전이형태들도 있다.

(3) 살아있는 전이형태 (Living Intermediates) : 명확히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알기 어려운 살아있는 전이형태들이 있다. 예를 들면 Coelacanth와 같은 것이다.

(4) 유전적 유사성 (Genetic Similarity) : 여러 생물 그룹의 DNA는 그들의 관계를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인간과 침팬지는 유전자의 98%가 같다.

(5) 철학적 지지 (Philosophical Support) : 과학철학에 따르면 가설이 이론의 지위를 얻으려면 이미 존재하고 있는 이론들과 성공적으로 관계지어져야 한다. 대진화는 유전학, 집단유전학, 생리학, 생태학, 지질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고생물학 등과 아무런 모순 없이 조화된다.

이 외에도 연대문제에 대하여 또는 지질학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지엽적인 문제 외에도 근본적인 비판도 있다. 이는 창조과학이 '간격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종 창조과학은 이와 다소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나 그러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러면 여기에 대하여 알아보자.

 

III. '간격의 하나님(God of Gaps)' 입장

If in fact the frontiers of knowledge are being pushed farther and farther back (and that is bound to be the case), then God is being pushed back with them, and is therefore continually in retreat. - Dietrich Bonhoeffer

나는 자연적 원인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덮기 위하여 초자연에 호소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의 과학이나 신학을 승인하지 않는다. -Asa Gray

번개가 어떤 과정을 통하여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 옛날 사람들은 번개가 신의 진노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입장을 '간격의 하나님'의 입장이라고 부른다. 이 입장은 두 가지 큰 (한 가지라도 치명적일 만한) 약점이 있다. 위에서 인용한 Bonhoeffer의 말처럼 이러한 입장을 취하게 되면 우리의 지식이 점점 성장할수록 하나님을 위한 간격은 점차로 없어져 결국에는 하나님이 필요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명백히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자연적인 사건을 통하여도 일하시므로 하나님을 위해서 반드시 초자연적인 사건을 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약점은 이러한 입장이 과학의 발전을 막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현상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개입의 결과로 돌려버리면 더 이상 그 현상의 메커니즘이나 자연적 원인을 찾는 것은 무의미해지므로 그 현상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할 수 없게 만든다. 탐구를 가로막는 견해는 가장 나쁜데 왜냐하면 어떤 견해가 주어졌을 때 이어지는 탐구를 통하여 그 이론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탐구를 할 수 없다면 그 견해를 수정, 보완, 발전 시킬 수도 없다. 아무리 잘못된 견해라도 탐구를 가로막지만 않는다면 그것은 얼마든지 교정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탐구를 가로막는 견해는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정반대의 입장으로서 일부 기독과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것이 방법론적 자연주의이다.

 

IV. 방법론적 자연주의(Methodological Naturalism)

우리가 어떤 자연현상에 관하여 자연법칙만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설명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다. 과거의 수많은 과학적 수수께끼가 해결된 지금의 시점에서도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 자연적인 원인을 가정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아주 명백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방법론적 자연주의는 방법론적 무신론(Methodological Atheism)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이 입장은 위와 같은 '간격의 하나님' 입장을 피하고자 과학은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오로지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만 설명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간격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과정 가운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과학에 있어서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세상이 자연적인 원인에만 묶여 있을 필요가 없을텐데 과학이 반드시 모든 것을 자연적 원인에만 돌려야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실제로 상당히 많은 경우에)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반드시 모든 경우라고 못박는 것은 오히려 탐구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J. P. Moreland는 그의 글 'Creation Science and Methodological Naturalism'에서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주된 옹호자로 Paul de Vries와 Howard J. Van Till울 지목하고 그들이 말하는 방법론적 자연주의의 4가지 중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1) 자연과학의 목적 (The goal of natural science) : 자연과학의 목적은 사건을 (자연적인 사건만을 의미함) 물리적 원리와 법칙과 장(field)의 설명적인 문맥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2) 방법론적 자연주의 vs. 형이상학적 자연주의 (metaphysical naturalism) : 방법론적 자연주의와 형이상학적 자연주의(또는 철학적 자연주의)는 서로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3) 자연과학적 설명 (Natural scientific explanation) : 과학은 사건을 단지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라는 질문에 자연적인 메커니즘을 가지고 대답한다.

(4) 통합과 섭리의 상보적 관점 (A complementarian view of integration and agency) : 과학과 신학은 상보적이다. 그것들의 대상은 다르거나 또는 같은 것의 다른 측면이다.

 

V. Howard J. Van Till의 견해

This is a Creation endowed with functional integrity. The Creator has equipped it to do whatever He calls upon it to do. It suffers no gaps of dificiencies in its economy that need to be bridged either by words of magic or by the Creator's direct manipulation.

Van Till의 견해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functional integrity이다. 예를 들어 다음 성경 구절들을 보자.

창 1: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창 1: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 1: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각각의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땅 또는 물에게 무언가를 하라고 부르신다. Van Till의 견해에 따르면 이 때 하나님은 마술과 같은 말씀을 하심으로 어떤 강제적인 능력을 행사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게 원래부터 부여된 역량을 발휘하도록 부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순간에 창조를 하실 때에 불완전하지만 원래 의도한 형태로 형성될 수 있는 역량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을 채우고 있는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이미 부여하신 역량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Van Till은 이러한 견해가 기독교 신학의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가이사랴의 성 바실(St. Basil of Caesarea; 330-379)의 저작 'HEXAEMERON'과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의 저작 'DE GENESI AD LITTERAM(창세기의 문자적 의미)'을 인용한다.

 

VI. 유신론적 진화론 비판

첫 번째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오해가 있다는 점이다. 즉, 죽음과 투쟁은 하나님의 속성과는 다르다는 점인데 창조 당시 이와 같은 죽음과 투쟁을 하나님이 과연 기뻐하셨는지에 대해 의문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간격의 하나님이 되고 있다는 문제점이다. 세 번째로 기독교의 중심적인 가르침인 창조, 타락, 구속을 부인한다는 점이다. 네 번째로 죄의 의미가 사라지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로 성경적 연대기를 진화론자들의 연대기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여섯 번째로 창조의 개념들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 비판은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다만 주의할 것은 정의 3을 사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과 정의 4를 사용하는 유신론적 진화론은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정의 4에는 비판이 되지만 정의 3에는 성립하지 않는 비판도 있음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정의 4를 사용하는 진화론에 대한 비판은 많이 접해 보았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주목할 만한 비판들은 주로 성경해석적 또는 신학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 '타락'의 문제일 것이다. 유신론적 진화론의 틀에서는 아담의 타락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겠는가? 창세기 1장의 날(욤)이 태양일이냐 긴 기간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타락의 문제는 기독교 신앙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또 다른 문제는 언급한 바 있는 '자연 선택'과 관련된 문제들이다. 그것과 관련하여 자주 제기 되는 문제 세가지를 열거해 보았다.

<1> 무작위적(random)인 변이는 자연의 작동이 우발적이고 비이성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은 다윈을 좇아 우연에 호소하고 있다.

<2> 생존경쟁을 하여야 하고 그 중 대부분은 고통당하고 경쟁에서 패하여 사라지게 되는데 이것은 약한 것에 대한 우주의 기본적인 잔인성을 지적한다.

<3> 자연선택은 무의식적인 과정이라는 점은 우주가 맹목적이고 생명이나 인간성과 같은 것에는 무관심하다고 암시한다.

요컨대 자연선택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쓰실 만한 것인가 하는 점은 매우 논란의 여지가 많다.

 

VII. 결론

나는 철학적 유신론자이며 기독교인이다. 하려고만 한다면 무로부터서도 창조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자연적 진화과정을 통하여 창조작업을 완수하기로 작정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해서 고찰해 보았다. 그것은 비록 여러 가지 성격해석학적 신학적 문제점을 지니고 있기는 하나 전적으로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신론적 진화론과 관계된 논의는 '진화'의 불분명한 의미로 인해 비생산적인 토론이 되어왔다. 유신론적 진화론은 적어도 가능한 한 대안으로는 취급받아 마땅하다.

열린 마음을 가지되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진화론은 - 유신론적 진화론을 포함하여 - 무조건 안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면 비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밝히기 전에 먼저 그것에 대해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Posted by 쉐아르
:
와이프가 새벽기도를 참석한지 이틀만에...

오랫동안 고민해오던 경제적 문제에 해결책이 생겼다.
그동안 고민해오던 큰 녀석과의 관계가 많이 개선 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30년 가까운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수한 기도의 응답을 받아왔다.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정신적으로, 때로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냥 우연이거나, 그냥 심리적인 해결책만이 아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질병의 치료까지...

성경이 이해가 안될 수도 있다.
구약의 하나님이 이성적으로 생각할 때 수준낮은 부족신일 수도 있다.
예수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주장... 유치한 흑백논리일 수도 있다.

그런데, 기도 하면 들어주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해주시는 분이라면...

기도할수록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책임을 느낀다면...
그 받은 사랑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면...

그냥 공허하던 인생에 목표가 생긴다면...
이제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의미있는 삶을 살아야지 다짐하게 된다면...

그냥 맡겨도 되지 않을까?

내가 내 인생을 운전하는 것보다 맡기고 사는게 더 행복한데 그거면 된 것 아닐까?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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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네시반에 미리 신청한 택시가 도착했다. 5시 10분에 공항에 도착해서 여섯시 조금 전에 비행기에 올랐다. 읽고 있던 템플턴의 책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지만... 금새 졸음이 쏟아졌다. 출장 가기전에 밀려있던 집안일, 회사일, 교회일을 마무리짓느라 최근 이틀동안 다섯시간정도 밖에 못잤기에 일단 잠을 자야겠다 싶었다. 그래서 스튜어디스가 깨우지 않도록 아예 눈가리개와 귀마개까지 하고 푹 잠이 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서울까지 열두시간. 비행기위에서의 시간이 나는 참 좋다. 내릴 때까지 그 시간을 내 맘대로 쓸 수 있으니까. 템플턴의 책은 구약을 지나 신약 중반에 와 있었다. 솔직히 이미 그 책에 실망을 하고 있었던 참이라 끝까지 읽기가 쉽지는 않았다.

여호와가 민족신에 불과하다는, 구약의 많은 이야기들이 신화나 우화라는 그의 주장은 나름 논리가 있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는 이야기들이 잘 정리가 안되었고, 그의 주장 내에서 모순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의 기도를 들으며, 어떻게 예수의 기도를 제자들이 들을 수 있었겠느냐 그 기도의 내용은 나중에 제자들이 짜집기 한거다라고 주장하면서, 그 기도의 내용을 들어 예수가 인간의 나약한 면을 보인다고 예수는 인간이라는 주장을 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제자들이 나중에 써넣은 거라면 왜 그들의 주장과 위배되는 내용을 써넣었을까? 모순적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교회가 힘을 잃어가고 있는가에 대한 그의 생각을 적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기독교에 대한 반박이라기보다는 일부 내용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충고라도 하는 듯해서 도데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그의 책에 대해 어떤 무신론자가 굉장히 반기독교 이론에 대해 굉장히 기초적인 책이라 했는데, 그 말이 이해가 되었다. 템플턴이 내어 놓은 문제들은 지금까지 교회 생활하면서 여러번 들어왔던 주장들이고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난 그라면 내가 신앙을 바로 버리고 싶을 정도로 내가 가지고 있던 모든 관념을 송두리채 흔들어 놓을 줄 알았는데...

어쨋든 그의 책을 마쳤을때 비행기는 인천 공항에 들어서고 있었다. 책의 후반부는 "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에 재난이 있고 슬픔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믿지 않는다고 지옥에 간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주장이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이 왜 이리 힘든가, 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통을 받는가라는 질문은 나도 계속 해오고 있는 질문이다.

호텔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리스트로벨의 "믿음 사건 (The Case for Faith)"를 들고 갔다. 템플턴의 책에 대해 대응해서 쓴 책이라고 할까. 그 책도 템플턴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을 하고 있다. 세상에 왜 고통이 있는가. 한가지 예로 인도의 한 지역의 예를 들었다. 하수도 옆에 사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곳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다가, 그렇게 죽어갈 아이들. 한쪽 눈은 병이 들었는지 감겨 있고, 다른 한눈으로 아무 희망도 없이 손을 내밀어 구걸을 하던 아이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나는 삼만원짜리 식사를 하면서 읽고 있었다. 회사에서 지불하는 거니 이왕이면 잘 먹자는 마음으로 먹는 거지만, 마음이 많이 찔렸다. 이 돈을 그 아이들에게 준다면 일주일 아니 한달도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난 한끼의 식사로 날려보내지만. 그들에게는 어쩌면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만큼의 돈이 될 수도 있는데.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사랑의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지 아닌지 아직은 모르겠다.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내 생활이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세상의 많은 고통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그들을 왜면하면서 살아왔던 생활.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기 위해 안달하던 모습.

내 사랑의 영역이 너무나 작다. 이제는 그 영역을 더 키워야겠다.

앞으로 삼주간의 출장 기간. 책을 볼 시간도, 생각할 시간도, 글을 쓸 시간도, 그리고 여기 저기 경험할 시간도 더 많다. 매일 매일 치열하게 질문하고 찾아봐야겠다.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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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편한 내방을 떠나 거친 사막을 헤메는듯한 느낌...

너무 멀리 가고 있는 걸까? 이러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건 아닐까?

편안함이 주는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그 매력을 일단 거부하고 시작하자.
Posted by 쉐아르
:
어제 올렸듯이 찰스템플톤의 글을 읽고 있다. 책의 시작을 매우 기본적인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다. "세상에 수많은 신들이 있다. 당신이 믿고 있는 신은 이전 사람들이 믿었던 신에 불과하다." 미국에는 기독교가 대세고, 중동에는 이슬람이 대세다. 그럼 당연히 대세인 종교를 믿게 되는 것인데 도데체 무엇이 다르냐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질문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인가 보다. 오남강 교수도 그의 책 "예수는 없다"를 '우리 아빠 최고' 신드롬으로 시작을 했다. 어린 아이들이 모여서 우리 아빠가 최고라고 자랑을 한다. 어릴적 아이들에게는 그럴듯한 직장다니며 멋진 차 끌고 다니는 아빠가 최고였을거다. 아니면 운동을 잘해 동네 운동회에서 상을 휩쓰는 아빠가 제일 멋졌을거다. 하지만 의식이 성숙해서 세상을 둘러보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 "아빠"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아빠(여호와)는 너희 아빠(지리산 산신령)보다 지적이고 힘도 더 세단 말이야... 라고 해봐야 그건 성숙하지 못한 의식이 아닌가. 이성을 가지고 접근하면 모든 종교는 거기서 거기인데, 기독교 제일주의는 일종의 제국주의라는 비판이다.

과연 그러한가? 나는 두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정말 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란 해석. 기독교 (천주교, 유대교 포함) 는 유대민족의 종교에서 시작한 것이고, 다른 종교들도 다 각 민족 혹은 지역별로 생겨난 것이다. 신이란 문화적인 창작품에 불과하고, 그 신은 인간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그 설명이 타당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

다른 종교는 모르겠지만, 기독교에서는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신의 형상에 따라 만들어졌다. 그래서 인간은 신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는 세상에 그의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의 원칙들이 세상 원리에 나타나 있다. 하지만 구약시대에 여호와는 오직 그의 선택한 백성인 유대인들에게만 자신을 드러내었고, 다른 민족들은 자신들의 지식 한도내에서 신들을 만들어내었다.

이런 질문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공통적으로 신을 닮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흔히들 양심이라 표현되는 것이다. 신이 없다면 왜 인간은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을 것일까? 그냥 우연히? 아마도 신을 바라는 것은 인간과 이 세상이 우연의 결과라는 주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독교의 해석에 대해서는 왜 여호와는 유대인에게만 나타났었는가라고 질문하고 싶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범답안은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사실 납득은 안간다. 모든 민족을 다 상대하지 못하고 유대인만 상대해야했을만큼 여호와의 능력이 부족했던 것인가?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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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찰스템플턴이 쓴 책 "하나님과 작별 : 내가 기독교를 거절한 이유 (Farewell to God: My reasons for rejecting the Christian faith)"이 배달되었다. 오늘부터 읽기 시작할 것이다.

내가 이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이유는 그의 배경 때문이다. 찰스템플톤는 그 유명한 빌리그래함의 파트너였다. 열다섯살에 기독교에 귀의한 이후 그는 빌리그래함을 만났고, 그의 복음전도운동에 파트너로 참여한다. 그의 열정적인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일부는 그가 빌리그래함을 능가할 것이라는 예견도 했다. 개인적으로 교회를 세워 1200석이 되는 교회가 가득찰 정도로 목회의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런 그가 신앙을 저버리고 불가지론자(그의 표현에 의하면)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무 어렸을 때,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성이 없을 때 예수를 영접했다" 성경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을 하기 시작한 찰스템플톤은 빌리그래함에게도 그의 신앙에 대해 도전했다. 빌리그래함은 그의 전도활동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당신의 말씀으로 믿고 인정하겠다"라는 고백으로 신앙으로 돌아왔다. 이에 대해 찰스템플톤은 "이성적인 자살"이라고 실망하며 모든 활동을 정리하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리스트로벨이 쓴 The Case for Faith라는 책의 초반부에 찰스템플톤과의 인터뷰가 실려있다. 그 인터뷰에서 찰스템플톤은 그가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지기 시작한 것은 라이프지에 실린 사진한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비가 오지 않아 먹을 것이 없어 죽게된 아이를 안고 울고있는 한 어머니의 사진이였다. 그 사진을 보며 찰스템플톤은 "사랑의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가 없다. 그들이 필요한 것은 단지 비가 내리는 거이다."라며 회의를 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비를 조절할 수는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다. 비는 하나님이 조절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 그의 의심은 다른 영역으로도 확장되었다고 한다. 그의 책에는 치매걸린 사람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는데, 실제로 찰스템플톤은 치매에 걸려있다고 한다.

그는 무신론자는 아니라고 한다. 그보다는 "세상에 하나님이 있다고 믿을만한 증거는 없다"라는 것이 그의 의견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성과 신앙은 같이 할 수 없다. 기독교에는 이성적으로 인정하기 어려운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그가 예수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인다. 그는 "예수는 실존했던 모든 인물중 가장 존귀한 인물이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리고 ... 나는 그가 그립다 (I miss him)"라고 고백한다.

왜 그는 하나님을 거부했는가? 그러면서도 왜 예수에 대해서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가?

리스트로벨이 쓴 책은 찰스템플톤이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 노력의 결과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 먼저 찰스템플톤의 고민을 먼저 보고 싶다. 내가 그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열린 맘으로 나는 그와 같은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고 싶다.

결과는 모른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계시다고 믿게 되겠지. 만약 없다면... 나도 같은 찰스템플톤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을까?
Posted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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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간 간직하고 있던 신념에 대한 질문을 시작하며... by 쉐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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